1. 빛나의 귀환
H가 전화로 빛나의 귀환을 알렸을 때 나는 일인용 식탁에다 미역국 하나만 달랑 올려놓은 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국물이 텁텁하게 미끈거리는 것 같아 허겁지겁 삼키려다가 요란한 기침을 터트렸다. H에게 국에 넣은 미역 건더기가 목구멍에 걸려서 그래, 라고 변명하면서 빛나가 언제 오느냐고 물어보았다. 곧, 이라고 H가 대답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새 학기부터 강의를 맡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학과장이 학부생들에게 양추자 수업 요즘 어떠냐고 하면서 좀 답답하지 않아, 라고 은밀히 물어보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 엄마인 양추자는 경기도 북쪽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 동부에 있는 대학으로 출강하면서 수업에 삼십여 분 늦기 일쑤였고 제시간에 도착을 하더라도 강의실로 분주하게 커피를 사다 나르느라 세 시간짜리 수업을 두 시간으로 토막 낸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나 역시 구내식당에서 학과장과 같이 밥 먹는 팀에 끼었을 때 그가 양추자를 두고 “이름부터 그게 뭐야, 그 이름으로 어떻게 비평을 하겠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빛나는 학과장의 열두 제자 중 넘버원일 뿐 아니라 그의 자리를 이을 후계자로 일찌감치 점지되었다. 그러니 열두 제자 중 열두 번째인 양추자를 밀어내고 강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것이다. H는 사진으로만 확인했지만 빛나가 살이 좀 쪘고 그 바람에 표정은 넉넉해 보이더라고 하더니 난데없이 생일 축하한다고 말했다. 나는 생일이 아니라는 말을 공들여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고 나자 내 입에서는 양추자밖에 없지, 라는 말이 트림처럼 흘러나왔다. 순간 지린내 같기도 하고 피 냄새 같기도 한 것이 풍겨 왔으나 그것이 내가 내뱉은 단어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멀리서도 맡을 수 있는 빛나 만의 고유한 향기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빛나가 와 봐야만 명확해질 문제도 아니었다. 빛나가 여전히 표적을 필요로 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은 아니다. 신중하게 타깃을 정하고 그것에만 집중하고 그것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이야말로 빛나가 살아가는 이유이며 활력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
나는 어깨를 옹그리며 컵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거울을 통해 양치질하는 여자를 들여다보면서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고 충고하기 무섭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더니 그래도 소용없으면 어쩌지, 라는 비관 섞인 걱정을 늘어놓았다. 빛나가 양추자가 아니라 여전히 나를 더 밝히고 내가 더 달콤하다고 여길는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아주 일리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언제까지나 그녀의 입맛에 맞는 유일한 먹잇감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문제는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입맛은 변하기 마련이고 똑같은 음식에 질릴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우리들의 세상이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나 역시 언제나 똑같지 않을 것임을 감안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빛나가 나를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던 것을 떠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필요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맛없는 식자재로 변신해야 한다. 쉬어 터질 수도 있고 악취를 풍길 수도 있으며 몸 바깥으로 굵은 뼈다귀 하나가 튀어나오도록 나를 세팅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우리가 빛나의 영향권에서 아주 벗어나 살 수 없는 거라면, 오히려 그 때문에라도 이번에 닥칠 이 싸움을 해 볼 만한 전투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나도 사람인 게 아닐까. H가 빛나가 온다는 소식을 부랴부랴 나한테 전하려고 한 의도에는 그런 계산까지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짐작되었다. 내가 빛나의 순진한 먹잇감이었을 때 나를 향해 가장 많이 인상을 찌푸렸던 사람은 H였고 빛나가 잠시나마 우리 집단에서 퇴장하게 되었을 때 나더러 며칠간 집에서 꼼짝하지 말라고 충고한 것도 H였다. 내가 어떻게 행동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얼굴을 찌푸렸고 또 순발력을 발휘해 가면서 나를 숨기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H가 다시 나에게 경고음을 보냈다는 것은 분명하다. 너의 바보스러움을 단속하라. 거울 속의 그녀를 향해 나는 다짐하듯이 고개를 끄덕여 본다. 지금은 학과장의 열두제자 중에서 내 편 비슷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에 만족할 때가 아니었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H가 나를 향해 연민의 시선을 보낼 수는 있어도 직접 돕거나 구조할 수는 없다. 나는 혼자 힘으로 빛나를 방어해야 한다. 다시는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갑자기 아랫배에서 통증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차가운 물을 너무 많이 마신 건가 하면서도 일단은 벽걸이용 달력으로 가서 날짜를 확인하려고 하는데 불현듯 오늘 날짜에 쳐진 붉은 동그라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밑에는 ‘나 귀빠진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 글자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검정색 잉크가 퍼지는 걸 보니 착시 현상은 아니었다. 우연히 미역국을 끓여 먹었는데 공교롭게도 생일이었다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