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

5. 다음부터는 말을 줄이겠습니다.

by 남상순



비평 전공인 학과장은 최소한 열두 제자 중에서는 시나 소설에 기웃거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D의 경우도 원래는 학과장이 일찌감치 점지해 두었으나 눈치 없이 소설을 전공하겠다고 대드는 바람에 다른 교수에게 권리가 넘어간 케이스였다.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내가 양다리 걸치는 기분으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채 소설을 쓰는 이유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학과장은 나의 미래를 열어 줄 수도 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이므로 우선은 소설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요즈음 내가 자주 상상하는 것은 그럴듯한 소설가가 되어 보란 듯이 학과장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추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근황을 흩뿌리고 다녔다.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아이디어가 빛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내 자리로 돌아와 쓰다 만 글을 끄적이려고 하는데 왠지 모르게 김이 빠졌다. 심란함도 수습하고 용기도 얻을 요량으로 슬쩍 열두 제자 전용 카페로 잠입해 꼬리를 숨긴 다음 동향을 살폈다. 자유 게시판에 올라온 이런저런 시답잖은 글들을 훑어보고 나서 그냥 나갈까 하다가 새 글 표시가 되어 있는 한 줄 수다에 들렀다. 양추자가 사진을 곁들인 글에서 이런저런 감상을 언급하고는 ‘다음부터는 말을 줄이겠습니다.’라고 써 놓은 게 보였다. 글의 뉘앙스는 변명도 아니고 의사 전달도 아니었다. 오로지 예술에 취하고 문학에 재미 들린 사람의 음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양추자가 진정으로 위태로워졌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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