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열두 제자
빛나는 그렇게 돌아와 무난하게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고 우리 열두 제자는 이런저런 소문과 사건의 내막을 긍정적으로 끌어안은 채 화양리에 있는 학과장의 개인 사무실로 모였다. 2022년에 시작하는 첫 번째 세미나였다.
내가 마지막 순서로 오피스텔 안에 들어갔을 때 단 하나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내 심장은 충격을 받은 채 쪼그라들었다.
“오랜만이다.”
빛나가 내 의자를 뒤로 빼 주었다. 나는 그녀와 학과장 사이에 앉았다.
“이제야 자리가 다 찼네. 다들 많이 기다렸지?”
학과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보스의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짐작과는 달리 그동안 스트레스를 꽤 받은 눈치였다. 빛나가 빛나가 아니었다면 후배들 중에서 특출해 보이는 대학원생 하나를 골라 자리를 채우고 얼마든지 세미나를 이어 갈 수도 있었겠지만 학과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열두 제자가 아닌 열한 제자 상태로 모임을 재개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스트레스를 초래했을 거라는 짐작은 해 본 적이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스트레스를 느낀 학과장은 어느 정도 우리가 믿는 그 학과장임에는 틀림없었다. 제자들을 충분히 눈으로 훑어본 다음 시답잖은 농담을 하기보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가 카리스마를 유지하는 배경이었다.
“그동안은 알다시피 내가 좀 바빴잖아. 이제 빛나도 오고 했으니까 이번 학기에 공부할 텍스트부터 정하자고. 같이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하나하나 꺼내 놔 봐.”
즉흥적으로 이런저런 신간들이 거론되었고 휴대폰 검색까지 동원하며 의논을 했으나 결국은 빛나가 제안한 책이 지정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음 주 발제자를 정하고 모아 놓은 회비 상황까지 점검을 끝냈으나 우르르 일어나 뒤풀이하러 가자고 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학과장은 ‘초월론은 왜 타성적인가’라며 주제를 꺼냈고 그것을 이번에 겪은 대통령 선거와 연관 지어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전 사실 초월론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겠어요.”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곤 하던 B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매우 쉬운 주제라고 여겼으나 이야기하면 할수록 어려웠고 오늘의 문화 현실과 연관 지어 봤을 때는 왠지 모르게 아킬레스건 같은 것이 그 안에 잠복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그것을 선거와 연관 지어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로 비쳤다. 나는 한마디도 안 하는 사람은 피하자는 주의여서 눈치껏 슬쩍 끼어들어 “저는 투표를 꼭 하겠습니다.”라고 한 다음 재빨리 빠져나와 듣기만 하는 사람의 자세로 돌아갔다. 나는 지독한 겁쟁이가 되어 있었지만 목숨을 보장한다면 이보다 더한 노릇도 못 하랴 싶었다. 어차피 모든 건 가식이고 연극일 뿐이었다. 화제를 움켜쥔 채 말을 가장 많이 한 것은 빛나였고 비학문적인 용어를 남발하면서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뜀박질을 감행한 것은 골칫거리 아줌마 양추자였다. 내가 저러다가 다치지, 라고 생각한 건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빛나와는 거의 근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B가 눈살을 찌푸리며 틈을 노리다가 마침내 양추자의 발언을 과감하게 자르고 들어가 순식간에 판을 장악했다. 하지만 일단 양추자를 제압하고 나자 이후에는 논점에서 흐지부지 이탈하더니 웅얼거리듯이 발언을 끝냈다. 양추자는 폭력을 체감하기는 한 것 같았으나 별 반응이 없었고 불쾌해하는 표정도 아니었으며 때가 되자 슬그머니 토론에 끼어들더니 또다시 이런저런 질문으로 종횡무진을 반복했다. 학과장은 토론이 마무리될 즈음 올해의 세팅을 완성했다는 듯이 “양추자는 말을 좀 줄이면 좋을 것 같아.”라고 말했고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양추자는 또 “넵 알겠습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때 빛나와 B가 서로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떡실신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