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일상, 나만의 브랜딩 36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맥주 한잔을 마시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 요즘 회사 일이 너무 버거워."
목소리에 묘한 힘이 빠져 있었죠.
저는 무심코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월급 꼬박꼬박 나오잖아. 그게 어디야."
순간, 친구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저는 나름 위로한다고 말했지만,
친구는 '네 고생은 별일 아니야'라는 의미로 들은 겁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말을 듣는 게 아니라, 그 말이 놓인 자리를 듣는다는 사실을.
맥락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도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맥락(Context)이란 단어는 라틴어 contexere(함께 짜다)에서 나왔습니다. 언어·행동·상황·배경이 서로 얽혀 '의미'를 완성한다는 뜻이죠. 언어학자 데보라 태넌(Deborah Tannen)은 대화 분석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단어 자체보다 그것이 놓인 상황과 관계 속에서 의미를 해석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즉, 우리는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왜 그 말을 했는가'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맥락을 읽는 능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텍스트 중심의 소통이 일상화된 것입니다. 문자 메시지, 채팅, 소셜 미디어 댓글 등 텍스트 기반 소통이 늘면서, 표정·몸짓·목소리 톤 같은 비언어적 단서가 사라졌습니다. 이모티콘이나 밈이 이를 보완하지만, 미묘한 뉘앙스까지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빠른 정보 소비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숏폼 영상, 짧은 뉴스 요약, 인포그래픽 같은 압축 콘텐츠에 익숙해지면서 긴 글이나 복잡한 내용을 차분히 읽고 해석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전체 흐름이나 맥락보다 눈앞의 한 문장, 한 장면만을 소비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우리는 자주 부분만 보고 전체를 오해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맥락 이해는 결국 공감 능력과 직결됩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왜'이 말을 하는지 상상하지 않으면, 의도는 쉽게 왜곡됩니다.
맥락을 읽는 힘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 힘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인문학적 훈련입니다. 역사는 사건을 '왜'와 '그때의 상황' 속에서 이해하게 하고, 문학은 대사 뒤에 숨은 심리를 읽는 법을 알려줍니다. 철학은 개념이 태어난 시대적·문화적 토양을 탐구하게 합니다.
심리학자 제롬 브루너(Jerome Bruner)는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논리·과학적 패러다임'과 '이야기·서사적 패러다임'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는 이야기적 사고가 사건의 맥락을 설명하고, 사람을 설득하는 힘을 갖는다고 말했습니다. 즉, 맥락을 읽는다는 것은 겉말 속의 속말을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얼마 전 업계 네트워킹 모임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AI 기술에 대한 대화가 오가던 중, 한 참가자가 "요즘 AI 때문에 우리 일자리가 위태롭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그래도 기술을 잘 활용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죠"라고 답했습니다.
같은 말이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렸을 겁니다. 20대 신입사원에게는 '새로운 도전'으로, 50대 중간관리자에게는 '현실을 외면하는 소리'로 들렸을 수도 있거든요.
이후 저는 대화할 때 상대방의 연차, 업무 상황, 그날의 컨디션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려고 노력합니다.
상황 스캐닝: 대화 전,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유'를 스스로 정리하기
배경 질문하기: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가?'를 상대에게 묻거나 상상하기
다층적 독서: 한 사건을 다룬 서로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보며 다양한 시각 훈련하기
우리는 종종 '좋은 말'을 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 말이 '어디에 놓이는가'입니다. 맥락은 메시지를 단순한 정보에서 살아 있는 경험으로 바꾸고, 그 경험이 쌓여 브랜드든 사람이든 신뢰라는 자산을 만듭니다.
맥락을 읽는 힘은 결국 '타인의 세계를 상상하는 힘'입니다. 그 힘을 기르는 과정에서 인문학은 가장 오래되고 깊이 있는 훈련장이 되어줍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면, 먼저 그 말이 놓일 자리를 살펴보세요. 그게 바로 맥락이고, 신뢰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