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회피의 심리학으로 읽는 김 부장의 뒷모습
최근 화제를 모으며 종영한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보면서 저는 매회 여러 가지 생각에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화면 속 주인공의 상황이 저와 정확히 같아서도 아니고, 대기업 부장의 삶이 특별히 낯설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였을 겁니다.
“저건 나일 수도 있겠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장면이 배우의 얼굴을 통해 생생하게 다가오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 조용한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드라마는 인생의 상실과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서 가장 크게 흔들린 것은 명예퇴직이나 재산의 상실보다 ‘정체성’이었습니다. 평생을 쌓아 올린 직함이 무너지는 순간, 김 부장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언제나 불안을 동반합니다. 드라마 속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그 밑바닥에는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감정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상실 회피(Loss Aversion)’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얻을 때 느끼는 기쁨보다, 잃을 때 느끼는 고통을 훨씬 더 깊고 크게 받아들입니다.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상실의 고통은 획득의 기쁨보다 약 두 배 더 크게 다가온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승진했을 때의 기쁨보다, 자리를 잃었을 때의 공포가 우리 뇌에는 두 배 더 강력한 충격으로 남는다는 것이죠.
이 사실을 떠올리면, 드라마 속 김 부장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울렸는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됩니다. 그의 위기는 단순한 드라마적 연출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본능적인 상실 공포를 자극한 장면이었습니다.
‘저렇게 될까 봐’라는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 ‘나도 이미 비슷한 길 위에 있는 건 아닐까?’라는 감정이 마음을 오래 머물게 했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불안을 경험합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직장, 가족, 사회적 체면, 건강, 명함 속의 직함, 오래된 관계, 그리고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집이라는 공간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조각들입니다. 화면 속 김 부장이 그토록 아파트와 회사 타이틀에 집착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겁니다.
그 조각 하나가 흔들릴 때, 우리는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불안을 경험합니다.
문제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우리는 변화 앞에서도 주저앉는 존재가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실제로는 더 이상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것들조차, 잃을까 봐 붙잡고 놓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현재의 불안이 미래의 가능성을 집어삼키곤 합니다.
그러나 상실 회피는 피해야 할 감정만은 아닙니다. 드라마의 결말이 우리에게 묵직한 위로를 주었듯, 이 감정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가장 선명한 심리적 렌즈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감정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에게 중요한 질문을 건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려고 이렇게 애쓰고 있는가?”
“정말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고, 놓아도 괜찮은 것은 무엇인가?”
김 부장의 뒷모습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 있습니다. 상실이 때로는 우리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때가 있으니까요. 상실은 때로 우리가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조용한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너무 꽉 쥐고 있어서 보지 못했던 것들, 내가 원한다고 믿어 왔지만 사실은 나에게 맞지 않았던 옷들….
“나는 지금 무엇을 잃을까 봐 두려운가?”
때로는 잃을까 봐 움켜쥐었던 것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내 손에서 떠나 있었음을 깨닫기도 하고, 놓치고 싶지 않다고 믿었던 것이 정작 내 마음을 가장 무겁게 만들었던 순간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지키고, 잃고, 다시 이어 붙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꼭 필요한지, 무엇은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은지 각자의 속도로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켜야 하는 것’보다 ‘지키고 싶은 것’이 조금 더 선명해지는 시간이 많아지길 조용히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