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늘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다. 대학에 가고, 돈을 벌고, 연애를 하는 일은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항상 덕담으로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주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듣는 걸까?
‘행복하세요.’라는 말은 하나의 인사말이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는 ‘올해는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인사처럼 건네고, CF에서도 자주 ‘행복하세요.’라고 시청자들에게 말하며 마치 자사의 제품을 구매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광고를 통해 행복하기 위해서 소비를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너무 지나치게 건넨 게 아닌가 싶다. 아마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한 ‘행복하세요.’라는 말의 수만큼 우리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다 보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도대체 행복이 뭐야?’라는 고민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무턱대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잘 모른다. 그냥 행복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돈으로 다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것도 지긋지긋하다. 즉,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내면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는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자세를 행복의 첫 단추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을 조절할 수 있어야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높은 지위, 많은 임금, 멋진 배우자 등 많은 것을 원한다. 하지만 대체로 이 모든 건 우리가 손에 넣지 못할뿐더러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계속 괴로워하며 살게 된다.
무엇을 내가 가지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고, 현실 속의 나를 똑바로 인식하는 마음 자세가 무소유의 출발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책과 여러 강의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봉사 활동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봉사활동을 종종 하면서 소유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나눔에 대한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번진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항상 “혼자 가지려고 하지 말고, 함께 나누려고 하세요.”라고 말한다. 혼자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우리는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통해 보지 않았는가? 그 끝은 언제나 비참한 법이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머릿속으로 이미 아는 동시에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 소유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와 나누는 일 또한 소위 잘 나가는 연예인이 종종 억대 기부자에 이름을 올리는 것일 뿐, 평범한 우리는 길거리에서 ‘후원해주세요!’라는 사람들의 손길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더욱이 뉴스에서는 종종 고가 제품을 사용하는 부유한 집안의 사례가 자주 등장하며 빈부격차를 이야기하고, 우리가 보는 드라마에서는 언제나 가난한 주인공이 부잣집 주인공을 만나 사랑을 만들어가는 허튼 이야기가 유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이라는 건 언제나 이야기 속에나 있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다.
행복에 대해 말하는 많은 책은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기준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겉으로 행복한 척을 하기 위해서 행동하고 있다는 말이 옳은 표현일 수도 있다. 빚을 내면서 까지 비싼 옷을 사 입고, 괜히 친구들 앞에서 어깨에 힘 좀 주고 지내려고 하니까.
어쩌면 그래서 많은 사람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환경을 갖춰야 한다. 그렇게 외부적인 조건이 갖춰져야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행복 지수를 높이기 위해서 밤낮 없이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는 서숙희 작가의 <원룸 시대>의 “이력서 쓰기가 특기가 된 이력 위로 그나마의 스펙은 스팸으로 쌓이고, 눈 붉은 불면의 밤은 무겁고도 더디다.”는 문구를 인용하며 우리 시대를 짧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 나와 같은 20대가 보내는 시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얼굴에 인상을 쓰고 사는 사람은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아.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도 많은 시간과 비용을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행복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도, 지금보다 더 커다란 행복을 위해서 오늘이라는 내일이 되면 과거일 기적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미움받을 용기>의 철학자는 우리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철학자 말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은 앞을 바라보며 열심히 뛰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들은 ‘헉헉’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숨을 내쉬며 보이지 않는 목표를 향해 고통스럽게 뛰지만, 그들은 분명히 보이는 목표를 향해서 함박웃음을 띄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행복이라는 걸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다. 종종 우리는 그들이 강연회를 열거나 책을 집필해서 출판하면 ‘도대체 행복이 뭔가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행복해질 수 있나요?’라고 묻지만, 그들의 답은 늘 한결 같아서 우리는 혀를 차며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나도 진작 행복할 수 있었겠지!’라며 고개를 돌린다. 바로 그 순간 불행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어쩌면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통해 스스로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자각하고 있기에 ‘행복해지고 싶다.’는 갈증을 다른 사람에게 ‘행복하세요.’라고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쫓아온 행복에 우리는 여전히 목말라 하고 있으니까.
나 또한 행복해지기 위해서 공부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대학에 다니고 있다. 나와 같은 많은 20대가 그럴 것이며, 좀 더 먼저 인생을 살아가는 어른들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끝에 우리는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절망하는 법을 배우고, 경쟁에서 괴로워하는 법을 배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허세를 부리며 행복한 척을 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행복하세요.’라는 말이 어쩌면 잔인한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행복해지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가 무책임하게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할 뿐이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곁의 행복보다 더 커다란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는 행복이 괴로움이라는 이상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오늘도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 하면서도 ‘지금 내가 행복해도 될까?’ ‘다른 사람은 더 잘 사는데,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오늘 여기에 있는 행복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행복하세요.’가 아니라 어쩌면 ‘지금 나는 행복하다.’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 이렇게 글을 쓰고, 글을 읽는 우리는 행복하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