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28년의 시간밖에 살아오지 않았지만, 삶을 살다 보면 사회의 부당함을 몸으로 느낄 때가 있다.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을 겪었을 때, 고등학생이 되어도 멈추지 않는 가정불화는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건데?’라는 반항적인 생각을 품게 했다. 정말 할 수 있다면 내가 사는 주변의 환경을 모조리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을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 자신이 변해야 한다. 어릴 적의 가정불화를 바꾸고자 했다면, 나는 내가 좀 더 마음을 강하게 품고 문제 해결을 하고자 했어야 했다. 집에 경찰이 왔을 때 엄마와 아빠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분명하게 사실 전달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사는 세상을 바꾸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처럼 처음부터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를 나는 갖고 있지 않다. 단순히 사람들 속에서 부당한 일을 목격하면 작은 분노를 하거나 글로 표현할 뿐이다. 어릴 때부터 용기가 없었던 나는 지금도 친구를 거의 사귀지 않고 홀로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한다.
친구. 이 글을 쓴 계기 또한 친구라는 단어다. 영어로 Friend, 일본어로 友達. 세계 어느 곳이라도 명사로 존재하는 ‘친구’라는 단어는 보통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극히 단순한 이 단어는 영화와 드라마,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하며 주인공을 곁에서 지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한때 나처럼 학교 폭력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도 새로운 학교로 진학할 때는 평범한 학교생활을 꿈꾸며 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나도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는 중학교의 내가 아니라 조금 다른 나로 생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거리를 좁힌 친구 사이에서도 같은 중학교 출신이 개입해 인간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친구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가서 다시 홀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내 삶에서 ‘친구’라는 단어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나는 딱히 사람들이 부대끼는 곳에 억지로 서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대학에 다니면서 혼자 생각할 수 있고,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높이 바라보고 싶었다.
어떤 사람은 사교성이 너무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친구 없이 사는 게 재미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아마 대학생이 되어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 한 번도 끼어본 적이 없거나 노래방, 클럽 등 여러 대학생의 놀이 문화가 꽃 피는 곳에 발걸음을 한 번도 옮기지 않은 사람은 꽤 드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모든 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때때로 하늘을 보면서 약간의 쓸쓸함을 느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쓸쓸함은 언제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쉽게 잊고 만다. 어쩌면 내 안의 부족한 모습을 채우기 위해서 따뜻한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곧잘 눈물을 흘리는 건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 바뀌지 못했던 내가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될까봐 피하는 건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와 비슷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친구라고 소개하고 싶은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지 않고 살았던 터라 도무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졸업앨범은 딱히 보관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버린 지 오래다. 도무지 이름을 찾을 수단이 없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친구가 했던 말과 성향을 비롯한 태도를 꽤 기억하고 있다. 문득 그 친구의 이름이 떠오른 이유는 <인간 노무현의 27원칙>이라는 책을 읽으며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했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을 바꾸지 않을래?’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지 않을래?’라는 말은 그 친구가 하굣길에 나한테 한 말이었다.
사춘기를 겪는 10대 시절에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이상을 품게 되는 건 흔할 것 같으면서도 흔한 일이 아니다. 이런 간절한 바람을 가슴 속에 품는 사람은 사회에 큰 불만을 품고 있거나 부당한 일을 겪은 사람이 많다. 중학교 시절에 나도 그런 바람을 품고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사는 방식을 바꾸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그 녀석은 나처럼 겉으로는 언제나 웃으면서 지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 녀석은 자주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구박의 대상이 되었다. 몇 번이고 웃으면서 상황을 넘기거나 최대한 친구와 잘 지내기 위해서 나름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잘 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 녀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세상을 바꾸지 않을래?’ 라고 말한 그때를 머릿속에서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 녀석에게 그 말을 들은 건 학교를 마치고 버스를 타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여고와 바로 옆에 붙어 있어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한 정거장 앞으로 나는 게 유리했다. 특히 일찍 마치는 날은 버스가 혼잡해서 버스를 타지 못할 수도 있어 무조건 나는 앞 정거장을 향해 달리듯 걸어갔다.
후문을 통해 한 정거장을 올라가는 길에 그 녀석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 세상을 바꾸지 않을래?”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었던 당시에 녀석은 학교에서 조금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나는 정확히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세상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고 말하면서 우선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런 모습을 가리켜 중2병이라고 말하거나 사춘기 특유의 방황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도대체 어떤 상황에 부딪혔으면, 10내 소년이 눈을 붉히며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할까?”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즐기고, 평범한 가정에서 평화롭게 산 사람은 이 질문이 대단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 여러 아픔을 겪었던 나는 이 질문이 전혀 낯설지 않다. 잔인한 세상에 절망한 적도 있고, 부당한 차별 대우에 이를 악물었던 적도 있다. 어릴 적에 몇 번이나 ‘이런 세상을 그냥 멸망하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는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솔직히 지금도 내가 바라는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파란 하늘 아래에 서서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고 있으면 문득 나도 모르게 ‘아, 정말 세상이 한 번 멸망하면 좋을 텐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한다. 누구나 공통된 과정과 결과를 요구하는 세상이 너무나 지루하고, 여전히 현실의 목을 조르는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비관적인 생각만은 하지 않는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이겨내기 위해서 나는 한순간 한순간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탈무드에는 “잘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다.”는 말이 있다. 나는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나 자신을 바꾸고, 내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그렇지 않을까?
나는 내 삶을 잘 살기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좀 더 새로운 경험을 해보기 위해서 손을 뻗는다. 그러다 우연히 손이 닿는 우연한 기회가 생기면 그것을 잡기 위해서 노력한다. 때때로 어떤 기회는 자신이 없어서 도전하지 않아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시행착오를 통해서 그런 후회를 줄여나가며 살고자 한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내가 나쁜 게 아니다. 사회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종종 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어릴 적에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내가 이토록 폭언과 폭력이 그치는 날이 드문 가정에서 폭력을 당하는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 불만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세상을 바꾸지 않을래?’라고 나한테 말했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 명의 친구.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서로 얼굴을 보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텐데, 막상 그 녀석과 만나는 부분이 없어 재회는 어려울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졸업식 때도 녀석은 재수를 한다고 기숙사 학원에 들어가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으니까.
만약 다시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다. 도대체 그때 너는 왜 세상을 바꾸고 싶었어? 지금은 어떻게 사냐?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