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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후 미우 Mar 26. 2017

그거 정말 정답 맞아요?

 우리가 사는 인생에는 애초에 정해진 정답이 없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 사람이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가장 후회하는 일은 자신이 도전해보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전에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고자 하고, 늘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에 동경을 품는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누가 정했는지도 모르는 정답을 외우느라 도전과 새로운 경험을 쉽게 맞닥뜨리지 못한다. 부모님과 주변 어른은 정답을 따라가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항상 정해진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을 성실하게 따라가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산다고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다.


 어릴 적 우리는 부모님께 종종 “너랑 다니면 부끄러워서 어디 같이 못 다니겠다.” 혹은 “남한테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좀 해봐라.”라는 말을 적어도 한두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런 형태의 말은 부모님이 아이가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욕심을 품고 있는 말이다. 정해진 정답을 꼭 따라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원하는 정답을 잘 맞히며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는 부모님이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멋진 트로피가 된다. 부모님은 ‘내가 이렇게 우리 아이 교육을 잘 시켰어!’라고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트로피가 될 아이를 언제나 달달 들볶는다. 아이가 공부에 관심이 없거나 중‧상위권 성적을 가지고 있어도 늘 최상위권 아이와 비교하며 나무란다.


 부모님의 마음으로서는 아이자 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른 아이와 비교하며 경쟁심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님의 그런 질타는 아이에게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생각지도 못한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마음에 입은 상처는 아이의 우울증과 낮은 자존감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등 무엇을 하더라도 가장 이상적인 정답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는 과연 ‘정답인 사회’인 걸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한 답이 아니라 남이 정한 이상적인 정답을 선택하기 위해서 나를 포기해야 하는 삶은 도무지 정답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과연 이런 삶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정말 후회하지 않도록 해줄까?


 다양한 나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서 이와 비슷한 주제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시 주제는 ‘늘 남이 정해놓은 답에 맞추려는 나, 비정상인가요?’였는데, 이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게스트 이훈과 비정상회담 출연진의 이야기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었다. 당시 이훈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뜻대로 살았었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연예인을 하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왜 괜히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느냐?’며 말렸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을 갔기 때문에 조금의 어려움이 있어도 즐겁게 살 수 있었다.”


 나는 이훈의 이야기가 바로 어쩌면 정답에 가까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 정답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이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 즐겁게 살 수 있으면 충분하다. 확실히 남들이 제시해주는 정답은 실패할 확률이 적어 더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정답이기에 우리의 삶이 마냥 공허할 수도 있다는 걸 주의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늘 남이 가는 대로 따라가다 뒤늦게 삶의 공허함을 깨닫는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러고 사는 거지? 내가 하고 싶은 취미 생활 하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나?’라는 질문을 마주한 순간, 사람들은 뒤늦게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도전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지금 당장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해진 정답을 따라가는 방식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추구하는 삶이 옳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아집이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이 선택한 길 또한 오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남이 정한 답을 따라가는 삶 속에서도 충분히 즐거움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성공 요소는 안전성이다. 나와 가족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는 일이 성공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손꼽힌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좋은 대학교에 가고자 하고, 좋은 인맥을 만들기 위해서 부모님이 무리해서 비싼 사립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를 선택한다. 아직 한국 사회는 인맥 사회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 또한 어머니의 인맥 덕분에 몇 군데서 다소 신세를 진 적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인맥만큼 무서운 게 또 없다. 한국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미 옛말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게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한국 사회의 부와 권력은 모두 부모님으로부터 세습되는 일이 빈번하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선택은 정해진 정답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적인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을 빈번하게 듣는다. 부모님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신분 상승의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해진 정답을 쫓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정해진 정답을 뒤처지지 않고 따라갈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꽤 오래전에 본 드라마 <학교 2013>에서 그렇게 정답만 강요하며 성공하기 위한 길을 강요한 엄마에게 1등을 하는 학생이 “엄마가 주시는 그 정답들, 다 내 것 같지가 않다고요. 근데, 엄마, 정답 맞아요? 엄마가 저한테 주시는 것들 정말 다 정답 맞냐고요!?”라고 되묻는 장면이 그려졌었다. 나는 이 장면이 정말 쉽게 잊히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보며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변 사람에게 말하고, 우리 부모님이 자식에게 강요하는 선택지가 정말 정답이 맞는지를. 어쩌면 우리는 문제 접근조차 잘못하여 오답을 정답이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정상회담>의 알베르토는 “사는 건 누구나 다 처음이에요. 정답은 없어요. 한 번 뿐인 삶의 정답은 스스로 찾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나는 알베르토의 의견에 십분 공감한다. 우리의 인생은 선택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기’ 버튼을 누를 수 없다. 혹여나 그런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버튼을 누르기 전에 다시 한 번 ‘이게 정말 최선일까? 나는 후회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기 마련이다. 선택이라는 건 언제나 후회와 갈등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결국, 아무리 이상적인 정답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는 늘 망설일 수밖에 없다. 만약 정말로 이상적인 정답을 선택하더라도 우리는 후회할 수도 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갖지 못했던, 자신이 선택하지 못했던 선택에 대해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생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이 정한 정답을 무리해서 쫓을 필요가 없다. 자신의 정답을 스스로 찾으면 되는 거다.


<내 인생에게 묻고 싶은 한 가지>를 읽어보면 이런 말이 있다.


“진정한 소명은 우리가 집요하게 찾아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가 자아를 깨닫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를 깨닫는 과정은 스스로 정답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이제 겨우 28년을 살아온 내가 하는 것도 솔직히 좀 이상하다. 나 또한 불과 몇 년 전까지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도 다 가니까 일단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 내 인생에서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20살 전까지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살면서 읽은 책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 답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었다. 이미 그 사람 중 일부는 빛이 약하더라도 반짝이면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고, 남이 정한 답이 나에게도 정답일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인생에서 번듯한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도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 내가 가는 선택한 답이 정답일 수 없고, 잘못된 길이라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쿠로코의 농구>라는 작품 속의 미도리마 신타로는 “넘어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한다. 정말 딱 그 말 그대로다.


 남이 정한 길을 따라가는 선택지와 내가 길을 스스로 만들며 가는 선택지. 어느 선택지를 선택하더라도 마지막까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강연 100도씨>에 출연했던 한재훈 교수님은 자기 이유가 있는 삶을 예로 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분명한 자기 빛깔과 향기가 있는 삶이야말로 자기 이유가 있는 삶이며, 그 삶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러니 남들과 다르다는 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글을 쓰며 정해진 정답이 아닌, 나만의 정답을 찾아가는 나는 그 말을 다시 가슴에 되새기고 싶다. 우리 삶에 잘 사는 방법은 정답이 없다. 내가 자기 이유를 가지고 사는 것만이 분명히 정답에 가까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후회하고, 고민하고, 힘들어하겠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내 삶을 살고 싶다. 20대인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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