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선물하거나 감사하다는 말을 한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분명히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런 일은 하지 않게 되었는데, 당시 다른 아이와 비교를 당하면서 혼이 났던 기억은 있는 어렴풋이 남아있다. '다른 집 애들은 해주는데, 넌 왜 안 해주느냐'면서.
아마 당시에 나는 그런 잔소리를 하는 아빠 혹은 엄마에게 '우리 집이 다른 집이랑 같나? 매번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인데, 그런 건 행복한 집에서나 하는 거다.'이라는 반항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애초 우리 집은 어떤 기념일에 의미를 두지 않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어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기도 했었다.
솔직히 이건 변명에 불과하지만, 나는 스승의 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생일에 대해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누군가는 특별한 날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매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넘어가고, 주변에서 보거나 들은 여러 사례에 대해서 나는 '저건 특별하니까' 혹은 '가식으로 하는 거지.' 하며 부정적으로 해석하기가 다반사였다.
어릴 적에 가지게 된 사고방식은 이제는 3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1강산이 바뀔 정도의 시간이 흘렀어도 나는 여전히 그때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의 성장이 멈추어버린 것 같다. 아직 나는 다른 사람에게, 특히 가족과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한 명과 세 명으로 나누어진 우리 가족의 모습에서 나는 과연 '우리'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정도로 가족에 소속감을 느끼는지 의문이다. 분명히 객관적으로 본다면 ‘가족’이라는 단어는 둘도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소속 집단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진심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절실한 소중함을 잘 모르겠다.
어릴 적이나 성인이 된 지금도 종종 엄마에게 정말 미안하고, 부족한 내 잘못으로 엄마에게 너무 큰 무리를 하게 했다는 생각에 큰 죄책감을 느낀 적이 많다. 아마 나는 평생 엄마에게는 죄인일 것이다. 이런 죄책감이 큰 탓일까? 그래서 나는 굳이 어떤 특별한 날에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끼거나 '다행이다'는 감정을 품는 건 옳지 않다고 여긴다.
그동안 읽은 천 권이 넘는 책과 대학의 일상, 그리고 여러 경험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은 메마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머리로 이해하고 있지만, 나는 가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당연한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없이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이 커서 나는 '내가 잘사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리고 있다.
무엇보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엄마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남아있기도 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아파할 수밖에 없는 가정에서 힘들게 자라야만 했느냐는 누가 보면 상당히 괘씸한 마음이. 나는 이것이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해를 추구하지만,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하는….
2015년 어버이날에 세 명으로 사는 우리 집에서 나는 엄마에게 "사촌 여동생은 이모한테 줄 어버이날 선물 사러 친구들이랑 쇼핑 갔단다. 니는 뭐 없나?"이라는 말을 들었다. 2017년 어버이날에도 “너희(나와 동생)도 선물하는 습관 좀 들여라.”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우리가 뭐 평소에 그런 거 했나? 그리고 매달 내는 보험료랑 레슨비 때문에 돈도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 일을 손가락질하며 누가 나를 향해 욕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이 평소 내가 어버이날을 비롯한 생일이나 기념일을 맞이하는 태도였고, 아직도 나는 어릴 때부터 이어온 습관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 세 시대에 이 말이 조금 부족한 것 같지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기울어진 사고방식을 바꾸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만약 누군가 이 일로 나를 크게 꾸짖는다면, 나는 갈릴레오가 남긴 유명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이용하여 '그래도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어릴 적 내게 너무 잔인했던 삶은 특별한 사는 의미를 찾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감사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일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했다. 아직 어떻게 그 마음을 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이어진 결함은 고등학교 시절의 한 선생님께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면서 정신과 심리 상담에서도 비슷한 말을 질릴 정도로 들었었다. 나 또한 이러한 걸 이겨내야 내가 한층 더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과 실천은 언제나 다른 차도를 달리는 법이다.
이제 나이가 20대가 아니라 30대에 가까워진 시기면 되었으면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말하는 게 무서울 정도로 언제나 곁에서 가족의 등을 받쳐주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정말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슬픈 음악이 나오는 흑백 장면처럼, 이 순간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날이 내게도 찾아올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나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한 번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을 이해하거나 사랑 같은 마음을 품어본 적이 없기에.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처럼 '내 마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가식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런 내가 못났다는 것을 잘 안다. 부도덕하고, 불효자식이라고 손가락질당해도 변명할 수가 없다. 유치한 자기변명으로 나를 옹호하는 내가 나도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무엇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과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은 정말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생각하기를 고집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8살이 되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점일까? 이제는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주변 사람이 생겨 어느 정도 웃으며 대학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이제는 살짝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왜 즐겁다고 말하는지 알게 되었다. 여전히 100시간 중 90시간은 홀로 지내지만, 그 누군가와 잠시 보내는 10시간의 가치를 알게 된 기분이다.
조금만 더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 속의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되어 엄마에게도 진정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디 그 날이 조금 더 일찍 올 수 있도록 힘내는 수밖에 없다. 나는 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다시 한 번 되씹으면서 이 글을 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