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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1.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창작소설)

1. 언덕에 매달린 동네 (1)

1. 언덕에 매달린 동네 (1)      

  그 동네 골목, 깊은 곳에선 항상 들릴락 말락 하는 재봉틀 소리가 들려왔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 낮은 소리는 자연스러워서 거리 풍경의 한 부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큰길에 있는 네댓 평짜리 공장 안에서도 재봉틀은 돌아갔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재봉틀 소리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트로트 가요와 이문세, 이승철의 유행가 소리에 묻혔다. 그 동네를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들은 재봉틀 소리가 나는 골목과 공장 앞을 지나면서도 그 소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동네는 서울 도심 인근에 있는 산동네였다. 바위가 듬성듬성 있는 야트막한 산엔 집들이 꼭대기까지 빼곡히 있었고, 산 아래부터 지그재그로 나 있는 큰길로 마을버스가 산꼭대기 종점까지 다녔다. 동네를 다니는 마을버스의 반대편 종점은 동대문 시장이었다. 동대문 시장 주변엔 또 여러 개의 다른 시장들이 있었다. 그 동네엔 시장에서 장사하거나, 시장에서 팔리는 침구류, 옷 등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산동네라고 해서, 굴 껍데기 같은 집들만 들어찬 것은 아니었다. 단비네 집에서 조금만 더 옆으로 가면 시영 市營 아파트 수십 채가 산 중턱부터 꼭대기까지 들어차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오층 정도의 아파트 수십 채가 가파른 비탈에 서 있어서 안 그래도 야트막한 산세를 위태롭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 아파트들은 말만 아파트였지, 당시 서울 인근 동네에 지어지던 말쑥한 아파트와는 달랐다. 그 시영아파트엔 엘리베이터가 없었으며 복도엔 심심찮게 쥐가 돌아다녔다. 거기다가 겨울에 눈이 와서 경사가 심한 산동네 길에 얼어붙으면, 그 길을 오르내리는 마을버스가 아파트 일 층의 가게를 들이받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집에 있다가 지진 난 줄 알았다', '무너지지만 않으면 되지.'라고 하며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었다. 또 시영아파트 일 층 벽의 일부가 허물어져서 철근이 드러난 곳이 있었는데, 주민들이 자신의 집에서 쓰레기로 나온 연탄재를 으깨서 철근이 드러난 아파트 벽에 덕지덕지 발라서 메워 놓곤 했다. 그러니까 그 아파트 입주자들은 연탄을 써서 겨울 난방을 해결했다. 단비는 그 아파트가 겨울 난방을 보일러가 아니라 연탄으로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어린 마음에도 연탄 아파트는 듣도 보도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 시영아파트는 이미 노후 시설물로 판정을 받아 오래전부터 재개발 소문이 돌았다. 

  그래도 동네 아줌마들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그 시영아파트엔 알부자가 여러 명 산다고 했다. 그 아파트가 처음 산비탈에 지어졌던 육 십 년 대 말엔 나름 서울에서 신식이었고, 그 시절부터 이 아파트에 살면서 근처 시장에서 원단, 옷, 건어물 등의 장사를 시작한 사람 중엔 한몫을 챙긴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렇게 장사로 돈을 번 입주자들은 대개 사대문 밖에 들어선 신식 아파트로 흩어져 갔다. 그때까지 시영아파트에 남아 사는 사람들은 돈이 들어온 집을 함부로 떠나면 안 된다는 미신과 엇비슷한 믿음이 있거나, 고집스럽게 새로 지어진 아파트의 편리함을 거부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동네 냉면 가게나 미용실에서 여자들은 이제 이 동네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한탄을 했다. 그리고 재개발에 대한 무성한 말들을 쏟아냈다. 시영아파트 수십 채를 모두 허물어 버리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겠다는 소문부터 시내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주택촌을 만들겠다는 말까지, 재개발 시기나 지역, 보상 등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불안함 속에서도 싼 방을 찾는 외지 사람들은 꾸역꾸역 동네로 들어왔고, 산동네 골목 집 문간방은 비어 있을 틈이 없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넓이에, 시멘트로 대충 마감한 층계를 올라가야 하는 골목 끝엔 단비와 단비의 할머니인 김 여사가 사는 집이 있었다. 그 층계가 얼마나 가팔랐냐 하면, 김 여사 집을 멀리서 보면 벽에 매달린 선반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그 낡은 단층집엔 손바닥보다도 작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이라지만 화단이나 흙은 없었고 작은 수돗가와 김 여사가 가꾸는 화분 십여 개 만이 담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 동네의 집들은 김 여사의 집처럼 대개 흙으로 된 마당이 거의 없었다. 겨우 있다는 게 시멘트로 벽을 쌓아 만든 화단이었는데, 그런 화단엔 호박이나 고추, 파, 가지 같은 식용 푸성귀가 심겨 있었다. 꽃이라면 봉숭아나 채송화 화분 정도였다. 하지만 김 여사의 집 대문 밖, 담벼락 아래엔 용케도 작은 흙바닥이 있었는데 그 작은 틈에 심은 능소화나무가 기세 좋게 담을 넘어 지붕의 반을 덮고 있었다. 꽃이라면 봉숭아나 채송화 화분 정도만 보이는 동네에 여름 내내 아이 주먹만 한 화려한 꽃송이가 무수히 피고 지는 능소화나무란 분명 특별한 존재였다. 산 아래 동네엔 산동네와는 대조적으로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큰 저택들이 모여 있었는데, 잔디 정원이 딸린 집들의 고급스러운 정원수조차 부럽지 않은 꽃나무였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능소화나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김 여사 집 앞 골목은 어느 때부터인가 외딴 섬처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 되어있었다. 아랫집에 세 들어 살던 옥수 네가 이사 나간 다음에는 더욱 그랬다. 능소화가 여름 내내 지붕 한쪽을 뒤덮은 풍경은 그렇게 사람들의 눈길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하늘을 향해 피었다가 때가 되면 제풀에 사그라져 갔다.     

  단비 할머니, 김 여사는 전쟁이 끝난 후에 이 동네에 들어와 동네 안에서만 몇 차례 이사 다니다가 수십 년 전에 그 집에 정착했다. 그 집에서 아들을 고등학교에 보냈고, 남편이 죽었고, 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장가드는 것을 보았고, 단비가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언제부터 허리가 꼬부랑 할머니처럼 곱은 김 여사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은 채 그 집에서 살았다. 김 여사는 매일 작은 집을 쓸고 닦기를 반복하면서 살았다. 집안일이 대충 끝나는 오후엔 마루에서 부업으로 재봉 일을 했다. 김 여사는 단비가 어렸을 때나 조금 컸을 때나 청소나 연탄 갈기,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단비에게 시키지 않았다. 대신 김 여사의 재봉 일감을 받아오고, 처리가 끝난 일감을 다시 배달하는 일을 단비에게 시켰다. 이를테면 재단사가 잘라놓은 커튼이나 아동복 감을 단비가 받아오면 김 여사가 레이스나 주머니 다는 일을 했고, 김 여사가 끝낸 일감들은 단비가 다음 집에 넘겼다. 그럼 다음 집에선 마무리 작업을 해서 최종적으로 인근 시장의 가게에 납품했다. 단비는 다람쥐가 숲속 나무통 속을 쏘다니듯이 집 앞이나 마을 골목길을 재빠르게 쏘다녔고, 그 동네의 실핏줄 같은 골목을 모두 꿰고 있었다. 단비의 어린 시절이란 골목 담 아래의 시멘트 바닥에 앉아 낙서하거나, 심부름으로 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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