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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1. 2024

이화동, 언덕 깊은 집(창작소설)

1. 언덕에 매달린 동네 (2)

1. 언덕에 매달린 동네 (2)


  단비가 일감을 받아오는 곳은 몇 군데 있었지만 주로 원산댁 아줌마한테서 일감을 받아왔다. 원산댁 아줌마의 집은 산 북쪽에 있는 시영아파트였다. 초등학생 단비가 원산댁 아줌마네 집에 가면 아줌마는 방에서 재봉틀을 돌리다가 단비를 살갑게 맞아 주었다.     

  “이쁜 단비 왔네?”     

  원산댁 아줌마가 아동복 일감을 보자기에 싸주면서 이북 사투리가 희미하게 배어있는 말투로 말을 했다. 티브이 드라마가 아닌 실제 생활에서 이북 사투리가 배인 투로 말을 하는 사람을 단비는 원산 아줌마 말고는 본적이 없었다.      

  “내레 전등 아래에서 어젯밤에 저거 하느라 눈알 빠지는 줄 알았어야. 밑단이랑 바이어스도 쉬운 게 아닌데, 니네 할머니는 눈 아프다는 소리 안 하네?” 

  “할머니는 낮에 햇빛이 있을 때만 일하세요.”

  “밤에 전깃불을 안 켜고 사니깐 그러는 거 아니잖니?”

  “테레비 틀어 놓을 때만 불 안 키는 거에요.”

  “나도 나지만, 니네 할머니도 참 대단하다. 집 밖 출입도 안 하고.”

  “.....”

  “니네 할머니도 옛날엔 안 그랬다는 거 아니?"

  "우리 할머니가요?"

  "옛날엔 니네 할머니가 내가 하던 옷가게 입구에서 마늘 장사했어야. 그때 니네 할머니가 살림 안 하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좋은 배추도 봐주고 그랬다야. 그땐 시장 여자들이랑 말도 잘하고, 시누이들 욕도 잘하고 그랬는데."


  원산댁이 작업대 위에 풀어놓은 일감을 단비에게 넘겨주기 위해 보자기 위에 쌓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만 보면 할머니였음에도, 허리를 곳곳이 세우고 서서 안경 아래로 일감들을 진지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면, 누구도 원산댁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원산댁 아줌마는 '아줌마'였다.      

  “자크 다는 것은 단가가 잘 나왔어. 백 오십 원이야. 레이스는 오십 원이고. 다 끝내면 여기로 들고 오지 말고 시장에 직접 갔다 주라. 가게 주소는 적어놨어. 알았지?”

  “예.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들고 가보라.”     

  단비가 일감을 들고 그 집 현관문 쪽으로 가려는 데, 낡은 소파 아래에서 자고 있던 중형견, '도꾸'가 고개를 들어 단비에게 코로 '킁킁' 소리를 내면서 반가움을 표시했다.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도꾸는 사람 나이로 치면 환갑, 진갑 넘긴 나이어서 눈이 침침하다고 했다. 그래도 오후 다섯 시에 원산댁이 도꾸를 데리고 아파트 앞으로 나가면, 도꾸는 아줌마 없이 자기 혼자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 아파트 앞으로 돌아왔다. 동네 사람들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길을 주인 없이 걸어가는 중형견을 동네 아이처럼 대접해 주며 예뻐해 주었다. 동네엔 떠돌이 개처럼 돌아다니는 몇 마리 개들이 있었는데 도꾸는 신통하게도 그런 개들과는 섞이지 않고 자신의 길만을 갔다. 도꾸는 그렇게 산책을 한 다음에 소파 아래로 들어가서 종일 낮잠을 잔다고 했다. 단비는 도꾸를 보면 뜬금없이 눈물과 웃음이 삐져나오곤 했었다. 

  정말 부자들이 보면 피식 비웃음이 나올 정도일지 몰라도 그 동네에서 원산댁 아줌마 정도면 알부자였다. 한때는 시장에서 옷장사도 하고 옷 공장도 꾸려나갔던 원산댁은 딸 둘을 대학 교육시켜 시집보냈고, 버젓한 집이 따로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용돈이라도 벌어야 한다며, 자신의 옛집에서 '오십원, 백원 띠기' 재봉일을 했다. 아줌마 딸들이 보일러가 되는 집으로 이사 가서 편하게 살라고 성화를 해댔지만, 원산댁 아줌마는 '도꾸'와 함께 자신의 전성기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그 집을 지키며 살았다. 하지만 원산댁에게도 그 동네에서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비는 며칠 전 영경이네 집에 물건을 건네주러 갔다가 일하는 여자들이 원산댁 아줌마 네가 이사 간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었다.      

  한 개에 오 십 원, 백 원, 혹은 몇백 원짜리 일감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였다. 김 여사는 단비가 들고 온 일감을 하루 안에 해치울 때도 있었고 며칠에 나눠서 끝낼 때도 있었다. 그러면 다음 날, 김 여사가 마감해 놓은 일감을 단비가 다음 집으로 넘기면 되었다. 일감은 동네의 다른 집이나 가내 공장으로 넘겼는데, 완제품의 경우 아예 시장에 있는 가게까지 단비가 들고 가서 직접 넘겨주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가게까지 직접 가서 물건을 넘기고 돈을 받아온 날엔 단비는 김 여사로부터 천 원을 특별 심부름 값으로 받았다. 초등학생, 단비는 그 돈으로 모처럼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가 단비는 좋았다.

  단비가 제일 자주 일감을 받아오는 곳은 영경이 집이었다. 영경이는 단비와 같은 학교에 다녔으며, 가끔 단비가 일거리를 많이 받아 들고 갈 때는 짐을 같이 들어주던 친절한 친구였다. 영경이네 집은 이 동네에선 드물게 이 층 벽돌집이었는데, 주인집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온종일 재봉틀 소리와 재단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담 너머로 들렸다. 

  단비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일 층과 지하엔 십여 명의 일꾼들이 온종일 옷을 만들었다. 재단사는 주로 지방에서 올라온 남자들이 했고, 재봉틀은 동네 여자들이 돌렸다. 이런 식으로 꾸려나가는 다른 공장엔 일찌감치 고등학교를 때려치운 언니들이 실밥을 뜯곤 했는데, 영경이네 어머니는 딸 같다고 학교 다닐 나이의 애들은 아예 쓰질 않았다. 김 여사는 그 말을 듣고 영경이 네가 잘하는 거라고 칭찬의 말을 했다. 영경이 어머니도 단비에게 일감을 주면서, 김 여사야말로 동네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면 마감이나 박음질 불량이 거의 없다는 말을 해주곤 했었다. 영경이 어머니가 십 년째 꾸준히 일감을 내주는 이유였다. 

  영경이네 집은 산 아래쪽이어서 단비 말고 시장 쪽 사람들이 오기도 좋았다. 그래서 항상 반쯤 열려 있는 대문으론 공장 일꾼들과 시장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영경이네는 곧 번듯한 공장을 따로 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영경이와 단비가 중학교에 가자, 영경이네 현관에 널려 있던 냄새 나던 신발들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단비는 백 장의 일감도 너끈히 들 수 있을 만큼 자랐지만, 공장에서 받는 일감의 양은 점점 줄기만 했다.     

  “우리 집은 올해부터 재단사 안 쓴데. 필요할 때만 아빠가 하신데.”     

  영경이가 방과 후에 같이 집에 가며 한 말이었다. 가내 공장에서 만든 싸구려 옷들이 시장에서 그런대로 팔려나가는 시절은 끝나가고 있었다. 형편이 어렵거나 학교가 싫다며 공장으로 실밥을 뜯으러 오던 동네 '언니'들도 더는 없었다. 그런 '언니'들은 시내의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단비의 귀에만 크게 들리던 그 동네의 미싱 소리는 진짜로 희미해져 갔다. 단비가 방과 후에 일감 보자기를 들고 산등성이 층계를 낑낑거리며 올라갈 일이 점점 없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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