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소방 호스를 타고 뛰쳐나온 펭귄
14. 소방 호스를 타고 뛰쳐나온 펭귄
여름이 끝나고 이 학년 이 학기가 시작되었다. 단비는 여름 방학 때와 다름없이 공부든 그림이든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시간만 보내며 지냈다.
단비는 교무실 복도를 지나다가 알림판에 붙어있는 '동문회 장학생 모집' 공고를 보았다. 자격 요건이 평균 칠십 점 이상이었고 담임의 추천을 받으면 된다고 쓰여있었다. 단비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빨리 돈을 모아 미국에 가기로 한 결심이 머리에 떠올랐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교무실에 들어가 보니 강기중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동문회 장학생 모집에 지원하려고 왔는데요."
"오단비, 네가?“
”네.“
강기중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단비를 경멸한다는 표정이 걸려있었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네가 왜 받아야 하지?“
"치, 칠십 점 넘고 담임 선생님한테서 추천받으면 된다고 해서...."
"넌 부끄러운 걸 모르니?"
"네?"
"니네 아버지가 좋은 회사에 근무하는데 염치없이 장학금 타먹겠다고 나서면 되겠어? 어려운 친구를 생각해야지."
"그게...."
단비는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 없는 것을 쓸데 없이 나섰다가 경멸이라는 구정물을 뒤집어쓴 꼴이었다. 단비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단비의 마음이 멀쩡할 리 없었다.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현기증 때문에 복도를 똑바로 걸을 수 없었다. 단비는 교실로 돌아와서 자리에 앉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은 열로 들떴다. 장학금 좀 받아보겠다고 선생님을 찾아간 것이 그렇게 면박을 받을 일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학생이 좀 어리석은 말 좀 했다고 그렇게 가차 없이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는 사람이 제대로 된 선생일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강기중은 종례시간에 짧은 연설까지 했는데, 단비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
"장학금이라는 것은 성적이 아주 뛰어나거나 가정 형편이 아주 어려운 사람이 받는 거다. 아무 구실거리나 찾아 장학금 달라고 나서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짓이다. 그러니까 나대지 말고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면 된다. 쓸데없이 나서면 짓밟혀도 싼 거다. 알겠지?"
반 아이들은 뭔가 옳은 말인 거 같기는 한데 강기중이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강기중은 자신이 할 말을 끝내고 교실을 나갔다. 단비는 자신이 겪은 이 작은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억울한 심정을 이해받고 싶었다. 하지만 단비는 자신이 아무리 잘 말한다고 해도 자신이 받은 모욕을 제대로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단비를 제일 잘 위로해 줄 수 있는 민희는 책상에 엎어져서 아픈 사람처럼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그날 학교가 끝나고 혼자 교문을 빠져나가며 단비는 중얼거렸다.
"이제 배철권이랑 있었던 일은 기억도 안 나네."
강기중이 남긴 인상이 너무 강한 나머지 이제 배철권이 남긴 부끄러운 기억은 아득한 옛일처럼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단비는 강기중이 기괴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사실 그날 있었던 일은 작은 일이었고 상처를 입을 정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이상하게 단비의 마음에 오래 상처로 남았다. 아마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느낀 모욕감이어서 그랬던 것 같았다.
고 이, 이 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고 삼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진로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선생님들의 잔소리가 늘어났다. 몇몇 아이들은 슬슬 압박을 느끼는지 동네 독서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중간고사 성적 발표가 있었는데, 단비네 반이 이 학년 전체에서 반 평균 점수로 일등을 했다. 아이들은 반평균이 학년에서 일등인 것과, ‘나’의 성적은 상관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행사를 만들고 싶어했다. 반장도 성적이 많이 올랐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반장은 학급회의에서 백설기 떡을 만들어 먹자는 제안을 했다. 쌀만 있으면 떡을 만드는 비용은 얼마 안 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불우이웃 성금을 내면서 쌀도 라면 봉지로 한 봉지씩 반장한테 내기로 했다.
그날은 가을 날씨치고는 후덥지근해서 늦여름과 같은 날이었다. 점심시간 후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육 교시 국어 수업만 들으면 그날 학교 수업은 끝이었다. 이틀 전부터 불우이웃 성금과 쌀을 걷었고, 그날이 마지막 날이었다. 체육 시간이다 보니 교실은 비어 있었고, 칠판 구석엔 반장한테 돈과 쌀을 내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운동장엔 사람이 많았다. 운동장 가운데는 일 학년 어떤 반이 체육 수업하느라 차지하고 있었다. 단비네 반 아이들은 운동장 구석에 있는 모래밭과 철봉 주위에서 매달리기나 달리기를 연습했다. 달리기를 하고 나면, 운동장 끝 그늘에 앉아 땅따먹기하거나, 삼삼오오 수다를 떨며 잠시 쉬었다. 그런데 반장이 철봉에서 매달리기 연습하고 내려오다가 발목을 살짝 삐어서, 선생님에게 양호실에 간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반장 따라다니기를 좋아하는 지애가 부축을 해야 한다면서 반장을 따라나섰다. 절룩이면서 가는 것을 보니 큰 부상은 아닌 듯 보였다. 단비와 아이들은 다시 남은 수업 시간 동안 수업에 임했다. 단비는 자신의 차례가 다가와서 단거리 달리기를 뛴 다음 철봉 옆 응달에 앉아서 쉬었다. 다른 애들도 자신의 차례가 오면 먼지를 폴폴 일으키며 뛰었다.
단비는 운동장 가운데에서 소프트볼을 하는 일 학년 애들의 수업을 자신도 구경했다. 그 애들은 제대로 게임을 했다. 어떤 체격 좋은 아이가 타석에 들어서서 초구를 노려 배트를 휘둘렀다. 이전의 아이들과는 다른 수준으로 공이 뻗어 나갔다. 야구로 말하면 아마도 홈런이었을 거 같았다. 단비는 운동장 바닥에 앉아서 공이 날아가면서 하늘에 그려지는 궤적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단비는 뛰어들면 빠질 것 같은 파란색에 반해버렸다.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단비는 어느 순간 두리번거리면서 아이들 사이에서 민희를 찾았다. 자신이 본 파란색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민희는 달리기를 하는 아이들 속에서도, 그늘에서 떠들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곧 수업시간이 끝났다. 인원 점검을 할 때 반장을 비롯해서 민희와 두 명의 아이들이 열외로 빠져 있었다. 체육 선생님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별다른 말이 없었다. 운동장은 소란스러웠다. 소프트 볼 시합을 했던 애들이 장비를 담은 궤짝을 체육관으로 옮기느라 무질서하게 움직였다. 별관에선 음악 수업과 가사 실습을 했던 애들이 운동장에 쏟아져 나왔다. 단비도 얼떨결에 그런 소란 속에서 수돗가를 향해 갔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안 보이던 민희가 어느새 아이들과 함께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소란스럽고 이상한 오후였다.
교실에 돌아온 아이들은 모두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구십도로 꺾여진 건물 건너편 복도가 보였는데 한 무리의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학생 주임과 담임, 그리고 사회 선생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한 무리의 교사들 뒤엔 반장과 지애가 따라왔다. 그들의 굳은 얼굴에서 분명 더운 날씨와는 반대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단비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곧 학생주임 일행들이 뒷문에 도착했다. 학생주임 옆으로는 지애가 음울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단비는 걔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마뜩잖았다. 지애는 학생주임 얼굴을 흘끗 본 다음 손가락으로 교실의 누군가를 가리켰다. 단비는 지애가 누구를 지목하는지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학생주임이 눈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렀다.
“당장 행동 그만! 전원, 교실에서 복도로 다 나간다. 소지품은 일체 자리에 둔다.”
복도 구석엔 하얀 분필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복도로 나온 아이들은 그 선 안쪽에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들어가 다닥다닥 서 있어야 했다. 아이들이 귓속말로 반장이 걷어 두었던 불우이웃성금 겸 학급비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전했다. 돈을 담아 주던 녹색 주머니가 감쪽같이 없어졌다고 했다. 단비는 그제야 왜 난리가 났는지 알게 되었다.
지애는 학생주임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체육 수업을 하다가 양호실에 들른 반장은 교실에 두고 왔던 돈 생각이 났다. 하지만 발목이 욱신거렸던 반장은 양호실에 함께 있었던 지애에게 교실로 가서 돈이 담긴 주머니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지애가 반장의 부탁을 받고 교실로 왔을 때, 민희가 교실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 지애를 보자 민희가 머뭇거리다가 재빨리 사라졌다. 뒤늦게 지애는 교실에 들어가 반장 책상에 손을 넣어 찾아보니 돈주머니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장과 함께 양호실에서 나와 교무실로 가서 조금 전에 교실에서 본 것을 담임에게 말했다.
교실에서는 세 명의 선생이 단비네 교실 구석구석을 뒤졌고, 옆 반 교실도 수색했다. 그러나 문제의 ‘녹색 개구리 문양 주머니’는 나오지 않았다. 단비네 반 애들은 계속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최민희 앞으로 나와!”
학생주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일순간 곁눈질로 백 수십 개의 눈동자가 민희를 향해 쏠렸다. 민희는 그런 눈동자들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로 하얀 분필 선을 넘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학생주임이 다짜고짜 민희의 따귀를 때렸다. 민희의 얼굴에 흐르던 건방진 기운은 단번에 꺾였다.
“너 체육 시간, 중간에 들어왔었지?
“.....”
“들어와서 뭐 했어?”
단비 마음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지애 같은 애의 말만 믿고 학생주임은 엄한 학생을 범인으로 몰고 갔다. 지애는 반장을 하녀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애였고, 단비는 그 애를 싫어했다. 단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지갑 아직 안 나왔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몰아가는 건 순서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너 뭐야? 왜 남에 일에 참견이야?
“저는.....”
단비가 몇 마디 덧붙이려고 입술을 달싹이는데 앞줄에 있던 아이들 중 누군가가 '야, 나서지마'라고 속삭이며 단비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단비가 아이들 틈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학생 주임은 ‘할 일이 많아서 봐준다’라는 표정을 단비에게 지어 보이다가 다시 민희로 시선을 돌렸다.
“최민희, 넌 교무실로 나랑 가고. 나머진 교실로 들어간다.”
단비를 포함한 아이들은 우르르 교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고, 십 분 정도 남아있던 국어 수업은 대충 끝났다. 강기중은 수업에 이어서 종례를 했는데, 잔소리를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간단히 전달사항만 말하고 끝냈다. 아이들은 시계만 쳐다보고 있다가 담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덜커덩 의자 소리를 냈다. 그렇게 그날 학교 수업은 끝이 났다.
아이들이 떠난 교실에서 단비는 교무실로 간 민희를 기다렸다. 주인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민희의 가방 옆에 서 있었다. 그런데 교무실 쪽에서 오던 아이가 교실로 왔다.
“오단비. 민희 기다리냐?”
“응. 민희, 교무실에서 뭐하고 있냐?”
“걔, 교무실에 없어. 반성문 쓰라고 상담실로 보내버렸데.”
“학생관 사층?”
“응. 도망 못 가게 밖에서 문도 잠가 놨데.”
그 아이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교무실 구석에 세워놓고 야단치면 편할 텐데 왜 그런 곳으로 민희를 보냈는지 단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구나 학생을 반성문 쓰라고 방에 들여보낸 다음에 밖에서 문을 잠갔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감금이었다. 학생관은 삼층까지는 교실이 있었지만, 사층은 학생들이 올라다니기 불편해서인지 미술실이나 과학실, 상담실처럼 제한된 학생들이 이용하는 시설이 있었다. 학생관 사층은 이 학교에서 교무실로부터 제일 먼 곳이었다. 상담실은 교사와 학생이 만나 이야기하기에는 생뚱맞은 장소였다. 건물이 ‘기역’으로 꺾여있다 보니 생긴 작은 공간에 방을 만들었고, 과거에는 학생들의 특별활동반 실로 썼었다. 그런데 스카우트 소속 학생들이 몇 년 전에 그 방에서 버너를 쓰다가 바닥이 그을릴 정도의 불을 냈었다. 그 일로 특별활동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이용하던 ‘특별반실’은 없어지고, 학교는 그 방을 ‘상담실’로 바꿔버렸다. 그 후에 그 방은 사람들이 거의 이용을 안 하는 방이 되었다.
단비는 민희의 가방을 챙겨서 사층으로 올라갔다. 아이들 말대로 상담실 문은 바깥쪽에서 열쇠로 잠겨 있었다. 단비가 노크를 해봤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상담실 옆에 있는 미술실의 푯말이 단비의 눈에 띄었다. 그 순간 단비는 얼마 전에 미술반 실에서 방송반 무대 장치를 만들었을 때 들었던 자물쇠 비밀번호가 생각났다. 단비는 번호가 안 바뀌었기를 바라면서 미술실 자물쇠의 번호를 눌렀다. 동화 속에서 비밀의 문을 여는 기분이었다. 번호를 누르고 자물쇠를 옆으로 돌렸더니 문이 스르르 열렸다. 단비는 미술실 안에 들어가서 구석에 있는 창문을 열었다. 구십도 각도 옆으로 상담실 창문이 보였다. 창문 안으로 책상에 앉아 있는 민희 머리가 보였다. 단비는 창문을 열고 미술실 구석에 있던 막대기를 들고 왔다. 그리고 허공 건너의 상담실 창문을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곧 민희가 미술실 쪽의 단비를 보고, 상담실 창문을 열었다.
“오단비!”
단비를 보고 반가워하는 민희를 향해 단비가 민희 가방을 들어 보였다. 허공을 사이에 두고 단비와 민희가 마주 보았다.
“괜찮아?”
“오줌마려.”
“어떻게?”
“괜찮아.”
“누가 널 여기다 가둬 둔 거야? 학주야 담임이야?”
“몰라. 정학 때리겠데.”
“말도 안 돼."
"정학 때리면 자퇴할 꺼라고 맞받아쳤어."
민희는 여유 있어 보였다.
"근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몰라. 지들 마음이지.”
민희가 운동장 쪽을 내려다보았다. 단비도 민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운동장 한쪽에서 마주 서서 이야기하는 손가락만한 학생 주임과 강기중이 보였다. 운동장을 내려다보던 민희의 얼굴엔 가소롭다는 표정이 번졌다. 단비와 민희의 눈빛이 미술실과 상담실 창문 밖 허공에서 부딪혔다. 민희가 의자를 끌고 와서 딛고 일어선 다음 창문 밖, 허공으로 몸을 내밀었다. 민희는 허공을 건너서 강기중과 학생 주임이 만들어 놓은 감금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단비는 그런 민희를 본 순간 놀랐지만 자신의 몸을 창 쪽에 단단히 갖다 대고, 난간을 손으로 짚어 보면서 민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민희가 창틀 난간을 잡고 한 발을 움직이고 다음에 팔을 미술실 창 쪽으로 움직였다.
운동장에 있던 학생 주임과 강기중은 이상한 기운에 이끌려 학생관 건물 쪽을 보다가 두 눈을 의심하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자신들이 가둬우었던 학생이 위험하게 창문 난간에 기대어 상담실에서 미술실로 건너가고 있었다. 학생 주임과 강기중은 혹시 소리를 지르면 벽을 잡고 건너는 아이에게 영향을 줄까봐 ‘야’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숨죽였다.
단비는 민희의 팔이 미술실 쪽으로 오자 얼른 잡았다. 그렇게 단비가 민희를 도와 민희는 미술실로 건너왔다. 미술실 창에서 미술실 바닥으로 뛰어내리자 순간 단비와 민희의 입에서 안도의 탄성이 튀어 나왔다. 민희 뒤쪽으로는 이제 다시 건널 수 없는 허공이 있을 뿐이었다. 단비와 민희는 서로 말은 없었지만 빨리 학교를 빠져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미술실에서 나와 복도 층계 앞에 섰다. 그런데 건물 일층에서 학생 주임의 숨이 넘어갈 듯한 호통이 들렸다.
"김민희! 너 거기 안 서!"
단비와 민희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두 남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단비와 민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는 사이 학생 주임과 담임의 우당탕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단비는 당황한 채 서 있는데, 민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건물 뒤쪽으로 향해 창문 옆에 있는 소화전을 발견했다. 순식간에 단비도 민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챘다. 단비와 민희는 벽에 연결된 소화전의 두툼한 호스를 빼 들고, 복도 창문 밖으로 던졌다. 학교 건물이다 보니 일반 건물 사층 높이보다 훨씬 높았다. 북쪽 창문 아래는 학교 건물 뒤쪽이라서 담장과 건물 사이는 응달진 오솔길이었고, 이 미터쯤 되는 높은 학교 담장엔 유리병을 깨서 시멘트로 발라 놓아서 위협적으로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지만 민희가 먼저 호스를 타고 내려갔다. 다음 단비도 호스를 타고 내려갔다. 두 사람은 전혀 말을 하지 않았고, 믿을 수 없이 능숙하게 내려갔다. 두 사람은 땅에 완전히 내려오자, 곧바로 건물을 돌아 뛰기 시작했다. 단비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니 학생 주임과 강기중이 사층에 온 것이 보였다. 학생 주임과 강기중은 숨을 헉헉 내쉬면서 창가에서 단비와 민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들은 호스를 타고 내려오지는 않았다. 단비와 민희는 운동장 담장을 따라서 교문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교문 가까이에 갔을 때 소리가 들려 단비가 다시 뒤를 돌아보니, 이번에는 학생 주임이 건물 이 층의 반대편 창문 쪽으로 와서,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단비가 앞을 보니 앞쪽엔 무슨 상황인지 몰라 수위실 창밖을 보면서 두리번거리는 수위가 있었다. 단비와 민희는 수위를 가볍게 무시하고 순식간에 교문을 통과해 나왔다.
‘아, 이런 것이구나!’
교문을 빠져 나오는 순간의 통쾌한 일탈감이란 허공을 잠시 나는 기분이었다. 단비는 십 미터 뜸 되는 장대높이뛰기를 성공한 기분이었다. 학교 밖으로 나온 단비와 민희의 얼굴은 한껏 들떠 있었다.
“기분 어때?”
“최고!”
단비와 민희는 뛰면서 소리쳤다. 두 사람은 길 건너 일본식 집들과 한옥, 술집들이 섞여 있는 골목 쪽으로 뛰었다. 미로같은 골목 깊숙히 들어왔다고 느껴질 때쯤 단비와 민희는 거의 탈진한 상태가 되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교복은 구겨져 있었고 얼굴과 손은 먼지와 땀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선생들을 따돌리고 왔다는 쾌감이 아직도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불과 삼십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숨을 돌리고 나자 단비와 민희는 큰 거리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단비와 민희는 땀이 식기가 무섭게 조금 전과는 다른 망막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집 말고 갈 곳이 없었다. 민희가 먼저 말했다.
"나야 원래 망친 몸이고. 나 따라온 거 후회 안 해?"
"어쩔 수 없었잖아."
"이제 어떻게 하지? 다시 학교에 가면 선생들이 벼르고 있을 텐데. 단비, 넌 지금이라도 학교에 돌아가서 선생님들한테 잘 말해보는 게 낫지 않겠냐?"
"아니."
단비는 길거리 가게 유리창에 비친 민희와 자신의 모습을 흘끗 보았다. 꾀죄죄한 꼴의 여학생 두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아까 체육 시간부터 한 생각이 있는데...."
"뭐?"
"바다 보러 가고 싶었어. 여수 바다."
"거긴 왜?”
"찾아가봐야할 곳이 있어."
"서울역에 가면 밤새 가는 기차가 있는데."
"진짜?"
심야로 갔다 올 생각을 못했던 단비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가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단비는 민희의 손목을 잡아끌고 근처 은행으로 갔다. 단비는 오랫동안 이런 도망을 준비해온 사람처럼 가방에서 통장과 도장을 꺼내들었다. 마감 시간에 가까스로 은행에 들어간 단비는 통장에 남아있던 십만원 정도의 돈을 찾았다.
단비와 민희는 은행에서 나와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차 안에서 단비는 민희에게 엄마, 황주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민희는 단비가 새엄마랑 같이 살고 있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었다. 깊은 사정을 듣는 민희는 진지했다.
단비와 민희는 여수행 심야 열차표를 끊었다. 열한 시 오십 분에 서울역을 떠나 다음날 새벽 여섯 시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열차였다. 단비와 민희는 표를 끊고 나서, 다시 차를 타고 민희가 여름 방학 동안 일했던 햄버거 가게를 찾아갔다. 민희가 알았던 언니가 가게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단비랑 민희는 저녁으로 햄버거를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민희의 부탁으로 그 언니는 가게 창고에서 다른 아르바이트 애들이 놓고 갔던 티셔츠와 바지를 갖고 나왔다. 입던 옷이라 좀 찝찝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단비와 민희는 교복을 벗고 그 옷들로 갈아입었다. 남의 옷을 입으니 단비나 민희나 어색했지만 할 수 없었다.
단비와 민희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저녁도 먹었고 옷도 사복을 입고 나니 좀 전까지는 없었던 여유와 호기가 생겼다. 단비는 이제 기차 시간까지 놀기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희는 먼저 공중전화부터 찾았다.
“학교에서 전화 왔다구? 학주? 내가 나중에 말할게. 나는 괜찮아.... 하루만.... 걱정 하지말고.”
학교에서 민희네 집에 전화한 것 같았다. 단비는 그렇다면 자신의 집, 그러니까 동찬의 아파트로도 전화가 갔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단비는 윤숙이 전화를 어떻게 받았을지 궁금했다. 민희가 통화하면서 집에 못 들어간다고 이야기하자 민희 어머니가 뭐라 소리 지르는 소리가 단비에게도 들렸다. 그러나 민희는 당황하지 않고 엄마를 설득했고, 민희네 엄마는 금방 민희의 요구를 허락했다.
"너도 집에 전화해야 하지 않아?"
"조금 있다가."
단비는 집에 전화하고 싶지 않았다. 동찬이나 윤숙은 학교로부터 이미 이야기를 다 듣고, 단비 친구들 집에도 전화했을 것 같았다. 민희네 엄마가 단비와 민희가 같이 있고 내일 들어갈 것이라는 말을 윤숙에게도 전할 것 같았다. 단비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집에 전화 걸지 않는 것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