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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12-2. 겨울은 그냥 가지 않는다

12-2. 겨울은 그냥 가지 않는다


  중간고사 이전부터 학교의 연례행사인 체육대회 준비는 이미 시작되었고, 중간고사가 끝나자 삼학년을 제외한 온 학교의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행사 준비를 위해 움직였다. 수업이 끝나면 선수로 뽑힌 애들은 배구 연습을 했고, 나머지 애들은 응원과 단체 무용연습을 했다. 오월 중순이 되자 체육대회 준비에 방과 후부터 일몰 때까지 운동장에서는 음악 소리와 배구 연습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영경이는 단체 무용연습이나 응원연습을 요령껏 피해서, 눈에 안 띄는 장소에서 혼자 귀를 막고 공부했다. 민희는 잔뜩 인상을 쓰며 먼지 나는 운동장 바닥에 앉아 응원 연습하다가 때 되면 집에 갔다. 체육대회에 취미가 없는 단비는 방송반 핑계를 대고 방송반 실로 도망쳐 와서, 방송반 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체육대회 연습 풍경을 보았다. 

  중간고사 끝나고 며칠 지난 방과 후였다. 속으론 '이런 맛에 방송반 하는 거지'라고 외치면서, 단비는 또 방송반 일을 핑계로 운동장 연습을 빼먹고 방송반 실로 왔다. 체육대회 날 방송을 위해 미리 방송 대본도 짜고 해야 할 일도 여러 가지 있었다. 방송실의 구조는 실제 방송 장비가 있는 엔지니어 룸과 방송반 실로 나뉘어 있었다. 장비가 있는 엔지니어 룸은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지만, 방송반 실은 방송반원에겐 언제나 열려 있는 공간이었다. 방송반 애들은 수시로 모여 회의도 하고 놀기도 했다. 방송반 실은 꽤 넓었다. 방 가운데는 여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고, 벽엔 캐비닛들이 있었다. 그리고 구석엔 무대를 꾸미는 데 쓰이는 합판으로 된 칸막이 여러 개가 있었다. 그런데 그 칸막이들이 묘하게 공간을 나눠줘서, 칸막이 안쪽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졌다. 그곳엔 벼룩이 살 것 같은 낡은 야전침대가 있었다. 그 야전침대에 누워있으면 칸막이 바깥쪽에선 잘 보이지 않아서, 잠시 낮잠을 청하기엔 딱 맞았다. 그날 단비는 방송실 야전침대에 옆으로 누워있었다. 칸막이들은 병풍처럼 단비에게 응달을 만들어 주었고, 운동장에서 나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다른 애들은 운동장에 있는데, 이렇게 누워 쉴 수 있다는 것이 꿀맛이었다. 단비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단비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낯선 남자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고, 단비는 어딘지는 모르나 차가운 얼음벌판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단비는 자신이 오한에 떨면서 얕은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뭐라 떠드는 남자 목소리가 칸막이 바깥에서 들려왔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단비는 잠결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배철권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본능이었을까? 단비는 그 순간 아주 작은 부스럭 소리도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이 굳어졌다. 칸막이 너머로 종이 위에 사인펜으로 뭔가를 적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비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숨마저 참으면서 가만히 있었지만 결국 그 낡은 야전침대는 '삐걱' 소리를 내고 말았다.      

  "거기 누구야?"     

  배철권의 당황한 목소리였다. 단비는 망설이다가 칸막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배철권이 어정쩡하게 의자에서 일어서 있었고, 단비와 같은 학년인 방송반원 두 명이 종이 뭉치를 앞에 두고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었다. 배철권의 얼굴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방송반원 아이들은 시험지를 향해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숨 막힐 듯 답답한 분위기였다.      

  "오단비. 거기서 뭐하고 있었어?"

  "잠시 잠이 들어서.....“

  "너도 여기 와서 좀 도와줘라. 얘들이 하는 거 보고 따라 하면 돼. 오래 안 걸려."     

  배철권은 이틀 정도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눈엔 핏발이 섰고, 낯빛도 까칠했다. 그 모습이 뿜어내는 공포에 단비는 저항할 생각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다. 단비는 뛰어나갈 생각도 못 한 채 얼결에 의자에 앉았고, 그제야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 똑똑이 보았다. 그것은 이 학년 일 반부터 오 반까지의 국어 중간고사 답안지였다. 그 반들은 정확하게 배철권이 국어 수업하는 반들이었다. 육 반부터 구 반까지는 다른 선생님이 맡았다. 그날 두 명의 방송반원과 배철권은 객관식 칠 번 문제에서 삼 번으로 쓴 학생들의 답을 이 번으로 고쳤다. 또 주관식 한자 쓰기 문제에서 거의 정답에 가깝게 썼으나 한두 획을 잘 못 쓴 학생들의 주관식 답을 고쳐 주었다. 단비 앞에 답안지들이 놓였다. 단비는 당장 소란을 일으키는 한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싫어요'라고 말하거나 뛰쳐나가야 했었다. 그러나 단비는 숨 막히는 실내 분위기와 평소와 다른 배철권의 기세에 눌려 ‘싫어요’, ‘안 하겠습니다’라고 똑부러지게 말 못 했다. 그리고 답안지에 손을 대고 말았다. 세 명이 나눠서 하다 보니 일은 십 오 분 정도 지나자 끝이 났다. 배철권은 답안지를 재빨리 봉투에 넣고는, 단비와 아이들에게 방송반실에서 나가라고 했다. 다른 방송반원 아이들은 복도에 나서자 재빨리 사라졌다. 단비는 복도 구석에 서서 배철권이 방송반실에서 나와 문을 잠그고 교무실 쪽으로 사라지는 것까지 보았다. 한순간의 기분 나쁜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방금 벌어졌던 일은 현실이었다. 실수로 벌레라도 집어삼킨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단비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느낌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에게 남아있을 것 같았다.

  단비는 복도에서 빠져나와 운동장 가장자리를 걸어갔다. 운동장엔 아직도 일 이 학년의 학생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한 채 체육대회 준비를 했다. 배구 연습하느라 공 튀기는 소리와 응원 연습 소리, 음악 소리 같은 온갖 소리들이 한꺼번에 섞여 열기를 뿜어내었다. 운동장에 나와 있던 민희와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단비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자신이 어리석고 비겁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누구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단비는 불과 십 오 분 전의 일에 대해 미치도록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뒤집을 수가 없었다.      

  체육대회가 이 삼 일 앞으로 다가왔다. 일 이 학년 학생 모두 체육대회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 이상한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서 흘러 다녔다. 이 학년 일반부터 오반 사이에서, 국어 시험 성적이 예상보다 잘 나온 애들이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시험이라는 것이 보고 나면 자신들의 예상 점수보다 실제 점수는 한,두 문제 차이로 낮게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여서 몇몇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공부에 관심 있는 애들은 배철권이 잘못 가리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B 여고가 이상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서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단비는 수업 시간에 배철권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불쾌했고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소문까지 떠돌자 단비는 불안한 마음에 말수가 적어졌고 의기소침해졌다. 단비는 자신에게 위험하거나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지렁이를 삼킨 것은 더러운 기분은 그날 이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단비는 며칠 동안 감기 기운에도 시달렸다. 민희가 말을 걸어왔다.      

  "집에 무슨 일 있냐?     

  단비는 학교 뒤뜰, 우물가에서 민희에게 방송반 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혹시 누군가 들을까 봐 두리번거리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단비의 이야기를 다 듣자 민희는 대뜸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하하. 난 또 뭐라고. 시험 답안지 고쳤대요. 고쳤대요!"

  "야, 조용히 해."

  "고쳤대요. 고쳤대요. 히히."     

  단비가 말렸지만 민희는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민희의 목소리가 뒤뜰을 한 바퀴 돌아 메아리치다가 학교 운동장까지 퍼져나갈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대수야. 별일도 아니구만." 

  "교무실에서 정학 준다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럴 거 같지 않은데."

  "왜?"

  "네가 자발적으로 한 게 아니라 선생이 시킨 거잖아. 그리고 너나 방송반 애들이 그런 일로 처벌받으면 소문이 퍼질텐데. 애들말고 학부모들 귀에 들어가면 좋겠어?"     

  민희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럴 것 같지만. 그래도 일이 잘 못 될 수도 있잖아.“

  ”우리 학교 교무실이 귀찮게 이런 일을 자세히 조사할 리가 없어. 그리고 내가 보기에 배 씨는 조사할 일이 너무 많아. 우리가 모를 뿐이지.“     

  민희는 말을 끝내자마자 돌아서서 잡초와 꽃이 섞여 있는 화단을 봤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지저분한 일에 관한 말은 잊어버린 듯한 어린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단비는 그런 민희를 보자 안도감을 느꼈다. 

  청명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단비의 마음엔 비가 올듯하면서도 쏟아지지 않는 지루한 장마 같은 시간이었다. 단비는 B 여고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전학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지 않아서 단비가 생각지 못했던 반전이 일어났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천막 아래에 배철권의 얼굴이 종일 보이지 않았다. 다음 월요일 아침에도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반 아이가 느닷없이 단비네 반에 뛰어 들어와서 배철권이 전근을 갔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그러니까 학기 중간에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소리였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침착과 침묵은 ‘올 것이 왔다’라는 의미였다. 학생 중 누군가가 교무실에 문제를 제기했는지, 아니면 교사들이 자체적으로 문제점을 발견했는지, 그 과정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배철권이 방송반 실에서 한 짓이 교무실에 알려진 것은 분명했다. 그다지 엄정하게 운영되어온 학교는 아니었지만, B 여고도 그 일만은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냥 뒀다가는 일이 공적으로 더 커질까 봐 학교 재단은 부랴부랴 교사를 바꾼것 같았다. 교무실은 전력을 다해서 조용히 처리하기로 하고, 외부에 단 한 마디도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단비는 학교의 조처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단비만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리면 되었다. 그런데 그때 단비는 배철권이 그렇게 사라진 일이 불러올 또 다른 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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