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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11. 이물질 

11. 이물질     

  겨울 방학이 시작하고 일주일쯤 지난 아침이었다. 안방에 있던 동찬이 주방으로 들어와 식탁에 앉았다. 지난 저녁에 퇴근하면서 주차장에서 윗집 여자와 싸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찬이 그 여자와 싸우고 들어왔을 때, 윤숙은 친구와 통화하느라 정신없었다.      

  "자기 잘못 아니라고 일단 소리부터 지르는 게 주특기더라고. 구경하던 사람 하나 있었는데 기가 막혀서 피하더라고."

  "그 여자 뭐 입고 있었어?"

  "모피코트였던 거 같았는데."

  "촌스럽기는. 나이 육칠십쯤 먹었으면 몰라도."

  "비싸 보이던데."

  “돈 쓰고 욕먹는 인간이라서 그래."

  "근데 어학원 원장이라는 여자가 왜 그렇게 교양이 없어 보이던지." 

  "중졸이라잖아요. 남편이 학원 차려 줘서 원장이고."      

  별생각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가 '남편이 학원을 차려 줘서'라는 윤숙의 말을 듣는 순간, 동찬은 괜히 윗집 여자 이야기했다고 후회했다. 윗집 여자가 요즘 윤숙의 질투의 표적이 되고 있음을 동찬은 깜박 잊고 있었다. 동찬은 슬그머니 대화를 끝내고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만 먹었다.      

  며칠 전, 윤숙은 대학생 아들이 있는 동네 여자와 함께 그 학원에 상담 겸 구경 갔었다. 동행한 여자의 말에 의하면, 학원 원장의 남편은 장사로 잔뼈가 굵었고, 음식점으로 돈을 벌었다고 했다. 부자가 된 남자는 자신이 하던 가게 근처에 매물로 나온 토익, 토플 학원까지 인수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남자가 경영하려고 했으나 음식점과 전혀 다른 사업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아내에게 줬다고 했다. 그렇게 그 여자는 토익, 토플이 뭔지도 모른 채 어학원 원장이 되었지만, 학원은 그런대로 잘 굴러갔다고 했다.

  윤숙 일행이 학원 안에 들어섰을 때, 하필 원장실에서 큰 소리가 나고 있었다. 유이로 된 창 안으로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다 보였다. 윗집 여자가 선생 세 명을 앞에 두고 삿대질을 해가며 '수강생들이 떨어져 나가는데 수업을 안 바꾸면 어쩔 거야! 니들만 강사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었다. 마침 학원 대기실엔 윤숙 일행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같이 간 두 명의 동네 여자는 원장실 광경을 보고 자기들끼리 속닥였다.     

  "강사들한테 소리지르면 학원에 붙어 있나?"

  "여기만 강사가 자주 바뀌는 데는 이유가 있었어."

  "학원이 안 망하는 것은 자리가 좋아서였고만."

  "우리 애가 그러는데 학생들도, 강사들도 원장 싫어한대요.”

  “그래요?”

  “언젠가 원장실 문 앞에 '원장님 BABO' 라고 누가 써놨대요. 근데 원장이 'BABO'를 읽지 못해 멀뚱멀뚱 있었다지요. 학생들 중 하나가 그 꼴을 보고 '원장님 브라보!'라고 말해 주었더니 그 말을 믿고 호호 웃었대잖아."

  "생긴 대로 논다더니."     

  윤숙과 같이 온 여자들이 학원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오며 원장 여자를 한껏 비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면 윤숙은 동네 여자들의 그런 분위기와 거리를 두었다. 윤숙은 그 윗집 여자가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본 순간 자신의 내부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나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윤숙은 자신의 패션 감각, 물건을 보는 안목을 활용하여 옷가게를 하고 싶어 했었는데, 자신의 계획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업원을 둔다고 할지라도 옷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고개 숙이고 비유 맞추는 일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윤숙도 윗집 여자처럼 사람을 부리면서 하는 일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단국이가 아직은 엄마의 손이 필요한 나이이지만 삼, 사 년만 지나면 엄마의 손을 귀찮게 여길 나이였다. 윤숙은 결혼 전에는 일할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결혼한 후에는 자기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윗집 여자가 원장 노릇을 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학원을 차릴 생각을 해보니 말만큼 간단하지는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윤숙에게는 윗집 여자처럼 현금을 많이 돌릴 수 있는 남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친정에서 받은 재산을 장사 밑천으로 밀어 넣는 것도 만약을 생각한다면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일부러 모험에 나서는 것은 현명한 계획은 아니었다.    

  얼마 전, 윤숙은 관련 일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봉황’ 그룹이 요즘 잘 나가고 앞으로 오 년간 걱정이 없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봉황’은 윤숙의 ‘집안’을 얕잡아 보고 남자의 유전병 사실을 감춘 집안이었다. 망해도 시원찮을 ‘봉황’의 사운이 확장일로라니 기분이 안 좋았다. 반면 자신의 친정 일가인 ‘나한’은 지난 십 년 사이 주력 업종에서 하락세에 있었다. 한 자리 차지하면서 잘 나갔던 친척들도 대부분 자리에서 물러나 앉았다. 윤숙의 집안은 여전히 잘사는 축에 속했지만, 예전처럼 자신이 특별히 잘 산다는 기분을 느낄 수가 없었다. 윤숙이 집안에서 물려받을 유산도 십 년 전에 비해 자산가치라 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윤숙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윤숙은 얼마 전부터 동찬을 방송국 기자로 만든 것에 대해 조금 후회했다. 십 년 전엔 꽤 괜찮은 선택으로 보였는데, 인제 보니 그다지 실속이 없었다. 기업체에 들어갔던 사람이 동찬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은 회사에서 나와서도 인맥이나 현장 지식을 기반으로 자기 사업을 해서 돈을 벌었다. 반면 기자라는 직업은 언론사에서 아무리 지식을 많이 얻어도 조직을 나와서 사업을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아 보였다. 더구나 동찬은 조직에서 성공할 것 같지도 않았다. 결혼 전에는 동찬도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욕망이 있었으나, 결혼 후에는 그저 조직에서 자리만 지키려는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먹이를 찾아서 들판을 헤매는 야생 늑대에서 집 안에서만 사는 애완견으로 변해있었다. 윤숙은 자신이 어학원 원장이 되지 못한 것은 순전히 동찬 탓으로 돌렸다.     

  "당신 옷가게 해보면 어때? 종업원 써서 손님 상대하고 당신은 물건만 골라오면 되잖아."

  "내가 옷가게 해야겠어?"     

  차갑게 비꼬는 윤숙의 목소리가 동찬의 귀에 꽂혔다. 윤숙 속도 모르고 동찬이 그런 소리를 하니 돌아오는 것은 면박이었다. 하지만 옷가게 이야기는 얼마 전에 윤숙 본인이 한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그런 반응을 보이는 윤숙을 동찬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찬은 억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윤숙과 더이상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다. 그때 단비가 형체 없는 유령처럼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왔고, 동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단비로 옮겨갔다.     

  "방학 특별 보충수업은 안 가니?"

  "우리 학교는 그런 거 없는 데요."

  "없다고?"     

  동찬이 단비가 한 말을 천천히 씹어 말하듯 되물었다. 단비는 대답을 잘 못 했음을 깨달았다.      

  "빨리 전학을 시키든지 해야지.”     

  동찬은 동찬대로 단비의 말을 듣자마자 윤숙과 대화를 다시 이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단비 문제는 혼자서 해결할 수 없었다.       

  “내 원. 아, 당신 비자 신청은 다 끝난 거지?"

  "빠꾸당했잖아."

  "당신이 걸릴 게 뭐가 있어?"

  "몰라. 그냥 아주 지랄 맞아. 신경질 나는 데 캐나다로 가버리고 싶다니까.“


  다행이 조금 전엔 싸늘했던 윤숙이 동찬의 말에 대꾸해 주었다. 윤숙은 단국이와 둘이 미국에 이 주 정도 갔다 오려고 비자 수속 중이었다. 원래는 다음 해 여름에 미국에 가겠다고 계획이었으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겨울에 가겠다고 나섰다. 윤숙의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 한 동찬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단비 영수 과외 선생님 좀 알아봐."


  '이건 또 뭐지?' 단비는 입 한 번 잘못 놀려 아침부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윤숙은 이 질문에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걔는 미술학원을 알아봐야 해."


  동찬은 윤숙의 입에서 나온 ‘미술’이라는 단어를 듣고 놀랐다. 


  "예체능이 답이라는데 가까운 길 놔두고 왜 돌아가?"

  "당신이 어떻게 알아?"

  "학교에 전화해서 이야기 해봤어."

  "우리 단비는 인문계야.“

  ”그러셔요?“


  동찬이 힘주어 단정적으로 말했지만 이미 학교에 전화해서 알아볼 것은 알아본 윤숙은 동찬의 말은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이 집안에서 단비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는 유일한 어른은 윤숙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단비는 인문계 쪽으로 가라고 우기는 동찬보다는 윤숙의 치밀한 합리성에 더 밥맛이 떨어졌다.      

  동찬이 출근을 하려고 현관으로 가자 단비가 쫓아갔다. 단비는 방학 내내 집에서 뒹굴뒹굴하겠다는 계획을 재빨리 수정해서, 학교도서관에라도 나가기로 했다. 난방비로 만 원을 내면 선생님 감독 아래에서 한 달 내내 자습할 수가 있었다.      

 "일반 보충수업은 없어도 도서관에서 하는 '특별보충학습'이라는 게 있어요. 그거 신청해 놨어요."     

  신청이야 나중에 학교에 가서 하면 되는 것이었고, 단비는 아빠의 전학 소리를 막으려면 뭐든 한다고 해야 했다. 동찬은 별다른 말 없이 집 밖으로 나갔고, 단비는 동찬이 사라지자 조금 전까지 당장 학교에 가기로 한 마음을 바꿔서 하루만 더 집에서 놀다가 가기로 했다.     

  윤숙은 안방에 틀어박혀 있었고, 단비는 윤숙이 방에만 있는 것 같으니 거실과 주방, 자기 방을 오갔다. 모처럼 오전에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면서 방학의 한가함을 누렸다. 티브이에서 재수 없게 동찬이 나오면 단비는 재빨리 티브이를 다른 채널로 돌려버렸다. 몇 년째 동찬이 시사프로그램에 나와 심각한 얼굴로 보도하는 모습을 봐왔지만, 단비의 눈에는 단 한 번도 동찬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러다가 티브이 보는 것마저 재미없어져서 단비는 티브이를 꺼버렸다. 그런데 거실이 조용해지자 안방에서 윤숙이 떠드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윤숙이 친척 동생에게 또 단비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어쩌겠어. 애 아빠가 데려와 살고 싶다는데.... 거기에 두면 대학 못 갈 거 같으니까 자기 밑에 두고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거지. 근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집 안에 사람 하나 느는 게 얼마나 신경 쓰이는 일이냐고. 그게 내 뼛골 빼먹겠다는 거라니까."     

  윤숙은 가까이 지내는 친척은 물론 학교 친구나 이웃들에게까지 두루 단비 이야기를 했다. 단비나 동찬 욕을 한 적은 없었고, 자신이 처한 상황 이야기를 하면서 단비 학교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곤 했다. 윤숙은 세 식구가 살던 집에 갑자기 큰 아이가 들어와 사는 상황을 숨기기보다는 드러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단비는 대충 보아 넘기지 못했다. 단비가 보기에 윤숙은 주변에 자신을 남편의 전부인의 아이까지 맡아서 키우는 속 넓은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있었다. 

  윤숙의 생활은 김 여사 집에서 단비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단비는 팥쥐 엄마나 백설 공주의 새엄마 같은 윤숙의 성격 때문에 혼자 외롭게 살 것이라는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동찬의 가까운 친척들은 대개 서울이나 경기도에 산다고 해도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사는데, 윤숙의 가까운 친척들은 윤숙의 주변 동네에 모여 살았다. 덕분에 동찬의 친척들은 명절에도 간신히 모였으나, 윤숙은 평소에 친한 친척들과 자주 왕래했다. 특히 사촌이라는 친척 여자와는 쇼핑을 같이 다니는 사이였다. 그 집 아이는 단국이와 비슷한 나이였고, 단국이와 같은 미술학원에 다니려고 일부러 자신의 집에서 좀 먼 학원에 단국이와 함께 등록하기도 했다. 단비가 알기에 아빠 쪽 친척 중에 나이 드신 어른들 말고 젊은 사촌지간에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 경우는 없었다. 제사와 차례를 지낸다고 모였지만 서로 친해지지 않았고, 뿔뿔히 흩어져갔다. 그런데 윤숙네 일가는 제사나 차례를 지내지 않으면서도 친척끼리 잘도 뭉쳐 다녔다. 윤숙은 친척뿐만 아니라 이웃이나 주변 사람들과도 교류도 활발히 하는 편이었다. 

  또 단비는 윤숙이 명절이나 제사 때에 아예 시댁 문턱을 넘지 않고 산다는 사실을 꼭꼭 숨기고 사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윤숙은 자신과 시댁과의 관계를 자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위에 떳떳하게 말하고 다녔다. 동네 여자들은 윤숙을 ‘냉정하지만 합리적인 여자’이며, 한 발 더 나가서 자신들이 부러워할 대상쯤으로 여겼다. 어쩌다 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에서 윤숙을 만나면 이런 소리를 한 여자들까지 있었다.


  "나도 그쪽처럼 내 의사 표시는 하고 살아야 하는데. 또 시집에 끌려가서 속만 끓이다 왔지 뭐야."

  "맞아. 나도 그래. 단국이 엄마가 비법 좀 전수해줘. 나도 배워야겠어.”

  "싫으면 싫다고 해."

  "그래. '노우'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어. 자기 용기가 참 부럽다."     

  여자들은 윤숙이 그렇게 거리낌 없이 '싫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에는 시댁보다 훨씬 잘사는 친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변 여자들은 윤숙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믿고 시집에 당당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꼭 돈이 있다고 여자가 윤숙처럼 시집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꼭 여유 있는 친정 때문이 아니라 윤숙의 야무진 자체 성격 때문에 시댁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윤숙은 이 동네에서 시집 일에 ‘싫어’라는 말을 잘못하는 여자들에게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대리 충족시켜주는 존재였다. 그들에게 윤숙의 시어머니는 일일연속극에서 등장하는 이유 없이 며느리를 구박하거나, 아들의 결혼생활에 간섭하려 들거나, 억지로 화목한 가정 분위기를 요구하거나, 직장생활하는 며느리에게 살림도 잘할 것을 요구하는 인간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윤숙의 한 면만 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윤숙은 자신의 모든 모습을 골고루 드러내지는 않았다. 윤숙은 주위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자주 전화번호를 바꾸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동찬의 친척들을 벌레 취급하면서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았던 과거와, 십 년 세월을 시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해도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윤숙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능숙하게 잘도 바꿨다. 윤숙은 피해자나 약자인 척도 잘했다. 그러면서 타인이 피해자나 약자인 척하는 것 역시 재빨리 발견했다. 그러니 남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도 드물었다. 단비의 눈엔 윤숙의 간교함이 보였는데, 단비의 눈엔 보이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엔 전혀 안 보이는 것 같았다. 하긴 남들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었다. 같이 사는 남편도 윤숙의 가증스러움은 못 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못 본 척하는지도 몰랐다.      

  거실에서 윤숙과 단비가 마주쳤다. 단비는 윤숙을 귀찮게 하고 싶었다.


  “나도 방학 동안에 미국에 가고 싶어요." 

  “뭐?”     

  윤숙 얼굴엔 ‘이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라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단비는 윤숙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네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단국이 미국에 보내는 줄 아니? 아니야. 친정에서 받은 돈이야. 그 돈으로 나랑 내 아들 미국 가보겠다는 데, 니가 왜 나서는 거야?’였다.      

  "아빠가 허락 안 하실 거다."


  윤숙의 이 말은 동찬의 허락 없이는 이 집안에서 그런 중요한 결정이 내려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빠가 허락하시면 저, 미국 보내주실 거예요?"

  "공부나 해."     

  윤숙은 이치를 뻔히 아는 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오단비, 남편 전처의 딸이며 앙큼한 성격에 고집이 있어서 다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닮아서 인물이 못생기지 않았고 뭐든 재주가 있어 보였다. 그림 재주 하나만으로도 윤숙은 단비에게 어떤 호감을 느꼈다. 윤숙이 과거 동찬에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인지도 몰랐다. 윤숙은 단비를 볼 때마다 저 아이를 잘 구슬려서 자신에게 고마운 감정을 갖도록 만들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단비를 한 집 식구로 받아들인 이유였다. 그러나 윤숙은 저 건방진 아이는 자신의 노력을 평생 인정 안 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단비는 이뤄질 수 없는 엉뚱한 제안을 자꾸 늘어놓아서 윤숙이 거절만 하는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윤숙은 ‘내가 새엄마 노릇이라도 해주는 걸 고마운 줄 알아’라는 말이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미국은 학교 졸업하고 니가 알아서 가라.”     

  단비는 윤숙이 허락해 줄 거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윤숙의 거절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윤숙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단비는 오히려 소소한 승리감을 느꼈다. 단비가 보기에 윤숙은 자신이 새엄마이므로 단비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비는 윤숙이 새엄마인지 아닌지에 큰 관심이 없었다. 친엄마마저 포기하고 가버린 마당에 새엄마든 누구든 싫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단비는 윤숙이 김 여사한테 한 짓, 십 년째 철저하게 무시한 짓이 끔찍이도 싫었을 뿐이었다. 단비가 추정컨대 윤숙은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이해 못 할 거 같았다. 윤숙을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윤숙에 대한 미움이 더 커가는 이유였다.     

  문득 단비는 동찬은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 궁금해졌다. 단비는 주위에서 한결같이 애틋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부부들이 많지 않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 집들에 비하면 동찬과 윤숙은 훨씬 화목하게 살았다. 알콩달콩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살벌하게 싸우는 일도 없었고, 윗집 여자 욕이라도 함께 하는 사이였다. 진짜 문제 있는 집은 아예 이야기조차 하지 않는 집이었다. 그런 집에 비하면 윤숙과 동찬은 비교적 괜찮은 부부였다. 다만 윤숙에 대해 동찬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사는 일은 간단치 않았고, 단비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아빠는 성격적으로 원래 무딘 사람일까? 아마도 그 여자네 집이 부자라서 같이 사는 것일 거야. 혹시 그것도 아니라면 참을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동찬의 마음은 어느 쪽인지 단비는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단비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은 이 집에서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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