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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12-1. 겨울은 그냥 가지 않는다

12-1. 겨울은 그냥 가지 않는다      

  단비가 동찬의 집에서 지낸 지 일 년이 훌쩍 넘었다. 동네 길이나 건물들도 눈에 익숙해졌다. 그 동네에서 단비가 좋아하는 것은 피자 가게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백화점과 외국 브랜드 매장들도 점차 멋있게 보였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입구의 '상가 건물'이 세상에서 제일 멋없는 건물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단비는 동찬에게 말한 대로 겨울 방학 동안 매일 학교 독서실에 나갔다. 난방도 되는데 난로도 피워서 독서실은 따듯했다. 아이들은 커다란 주전자를 난로 위에 두고 물을 끓여 습도를 조절했고, 가끔 난로 위에 귤껍질을 태우는 장난을 치곤 했다. 또 조리실에서 들고 온 큰 냄비에 팝콘을 튀겨 먹기도 했다. 단비는 민희에게 독서실에 나와 같이 공부하자고 말 해봤지만, 단비는 가게를 봐야 한다며 학교엔 나오지 않았다. 민희는 다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려다가 못하고 그냥 집 가게를 보면서 방학을 보았다. 단비는 오전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엔 민희가 일하는 가게에 가서 영화를 같이 보곤 했다. 민희네 가게가 김 여사의 집에서 멀지 않았음에도 단비는 김 여사의 집엔 들리지 못했다. 오후 시간에 민희네 가게에서 놀다 보면 금세 저녁 시간이 되어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다. 소소한 즐거움과 안락함이 있는 일상이었다. 그렇게 겨울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월의 마지막 주였다. 이월 말이 다가오면서 날씨도 점점 따듯해지는 것 같았는데, 그날은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서 날씨가 흐려졌다. 봄방학 중이라 대다수 아이는 학교에 나올 일이 없었다. 하지만 각 반에서 지원한 몇 명의 아이들이 독서실에서 공부하겠다고 학교에 나왔다. 그런데 교문은 닫혀 있었고 어디에도 공지사항을 알리는 종이는 붙어 있지 않았다. 정문 옆 수위실에도 사람은 없었다. 교문 앞엔 수십 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웅성거렸고, 몇몇은 담장의 쇠창살 너머로 학교 안을 들여다보았다. 특히 아이들의 시선을 끈 것은 운동장 구석에 주차되어 있던 낯선 검은색 차들이었다. 분명 중산층 가정에서 타는 종류는 아니었고, 회사 사장님들이 타는 차라고 말하기에도 뭔가 더 과시적인 빛깔이 차체를 감싸고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본관 건물은 적막 속에 있었다. 교문 앞에 모여선 애들은 이미 그 차의 주인이 ‘어깨’라는 말을 수군댔다.     

  "교장이 운동장 땅을 저당 잡혀서 빚을 냈는데 못 갚아서 깡패들이 쳐들어온 거라니까."

  "운동장 내놓으라고?"

  "학교는 교육부 껀데 무슨 저당?"

  "그건 공립이고 우리는 사립이잖아,"

  "정말이야? 근데 뭘 하다가 빚까지 갖다 썼을까?“

  ”도박 빚이라는 소문이 있어.“     

  단비는 ‘도박 빚’이라는 말은 믿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아무 얘기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운 날씨에 발만 동동 구르던 아이들은 눈까지 내리자 흩어졌다.      

  저녁에 단비는 민희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기 위해 민희네 가게로 전화 걸었다. 그랬더니 민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이야기를 했다.      

  ”오늘 가게 앞에서 마을 버스가 눈길에 미끄러지는 사고가 있었어.“

  ”니네 가게 괜찮아?“

  ”사고 자체가 건물을 들이 받을 만큼 큰 사고는 아니었어. 앞에 나무를 들이 받다가 다시 휘어져서 우리 가게는 괜찮아. 몇 사람은 다쳤는데 다행히 심각히 다친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

  ”다행이다.“

  ”이번 겨울에 눈이 많이 안 와서 다들 이번 겨울은 사고 없이 그냥 지나가는 줄 알았데.“     

  단비는 민희와 이야기를 하다가 김 여사 생각이 났다. 김 여사는 자동차가 빙판길에 언덕에서 미끄러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겨울은 그냥 가지 않지’라고 말하곤 했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는데 김 여사가 어떻게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 동네가 그래.“

  ”우리 동네만 그런 게 아니라, 사고란 것이 방심하고 있으면 일어나는 거겠지.“

  ”그래.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눈길 사고가 많이 난다고 하더라. 강원도의 그 고갯길 같은데.“ 

  ”이제 곧 학교 가야 하는데 설마 계속 춥진 않겠지.“

.

 그날 이후 다행히도 번쩍거리던 검은 승용차는 다시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고, 학교운동장 한 귀퉁이가 어딘가로 팔려간다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일을 크게 만들려고 여기저기에 떠드는 아이도 없었다. 학기 중간이 아니라 방학 끄트머리에 생긴 일이다 보니 그날의 일은 흐지부지 묻혀갔다. 돌아보면 그날 있었던 일은 이 학년이 되어 단비에게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예고하는 작은 사건이었는지도 몰랐다.     

  이 학년, 삼월 첫 등교일이었다. 단비와 민희는 운 좋게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아이들은 새로 배정받은 교실을 찾아가서 자리 잡고 앉은 다음, 약간 흥분한 상태에서 누가 담임으로 들어올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떤 애가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와 칠판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교무실 칠판에 적혀져 있던 각 반 담임 명단을 보고 온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칠판에 적은 이름은 '배철권'이었다. 교실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단비는 칠판 위의 담임 이름을 본 다음 민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담임이 누구이든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은 민희였지만, 민희의 얼굴 반쪽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다가 민희는 아예 책상에 얼굴을 처박아버렸다. 

  배철권, 오십 대 초반이었고, 그의 코는 항상 술에 취한 사람처럼 불그레해서 밤새 술을 마시다 출근한 사람처럼 보였다. 또 하체에 간신히 걸쳐진 바지는 화장실에서 지퍼를 반만 닫은 채 나온 사람 같았다. 한 마디로 어떻게 교사가 됐는지 의심스러운 자였다. 학기가 시작되자 배철권은 전교에서 가장 짧은 조례와 종례를 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배철권을 얕잡아 본 반 애들은 자리에 앉아 티 안 나게 째려보았고, 그런 애들의 태도에 배철권은 할 말을 제대로 못 했다. 국어 수업 역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편애한다든가, '무조건 좋은 대학에 가야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다'면서 시험 등수가 떨어진 애들을 때리는 교사는 배철권에 비하면 나름 훌륭한 교사로 보일 지경이었다. 배철권은 수업 시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고, 수업 시간 채우기가 버거웠다. 그리고 남는 수업시간엔 인생을 알아야 한다면서, 여학생들에게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든가, '바지씨를 잘 만나야 한다', '결혼을 했으면 아이로 남자를 묶어야 한다' 등과 같은 말을 해댔다. 다른 학교에서 교사가 이런 말을 여러 차례 긴 시간 동안 떠들었다면, 학교로 항의 전화가 올 일이었다. 하지만 B 여고에선 그런 일은 없었다. 배철권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이 없어서, 애들은 그의 문제성 발언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이 끝나고 단비는 민희와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민희가 먼저 말을 했다.       

  “학교가 좀 이상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잖아.”

  "학부모들한테 배 씨같은 인간이 교사로 있는 거 들킬까봐 학교에서 절대로 담임을 안 시킨다고 들었거든. 그런데 왜 담임을 줬지?" 

  "우리 학교가 그렇게 세심하게 신경 쓰는 줄 몰랐네."

  "혹시 교장이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상이 와서, 배 씨가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교무회의에서 배 씨도 담임시키라고 지시한 거 아닐까? 미친 인간 눈엔 미친 인간이 정상으로 보인다고 하잖아.“

  ”큭큭. 아냐, 외계인이 우리 학교 교무실에 침입해서 교장을 원격 조정하는 것일 수 있어.“

  “이젠 외계인 조종설 까지 나오네.”     

  냉소적인 미소를 교환하느라 잠시 끊어졌던 대화는 단비가 말을 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왜 있잖아. 우리 작년에 우리가 영어랑 지리, 물리, 엄청 비웃어줬잖아. ‘우울 삼종’ 세트라고.“

  ”암울했잖아. 보기만 해도.“

  ”음울한 성격이라고, 가난하고 촌스럽다고 싫어했고, 재수 없다고 놀려댔어. 그런데 그 선생님들한테 잘 나지 못했다고 몰아붙였던 거 같아. 그게 참 건방졌다는 생각이 요즘에 들어. 배 씨 보고 있으면.“

  ”아. 그야 그렇지. 배 씨와 는 비교가 안 되지.“     

  민희는 학교가 지진으로 무너지든, 도둑이 들어서 학생기록부를 몽땅 들고 가든 상관 안 할 거 같은 아이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학교 걱정을 하는 모습이 단비의 눈에 조금 이상하면서도 신기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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