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10. 추위를 싫어한 펭귄

10. 추위를 싫어한 펭귄 


  B 여고 가을 학기에는 학생들이 모두 참가하는 합창제와 특별활동반에 따로 가입한 학생들 위주로 하는 축제가 있었다. 이 두 행사가 끝나고 기말고사만 치르면 겨울 방학이었다.      

  ”우리 당첨되었어. 경쟁률이 얼마나 높았는 줄 알아? 우리 정말 운이 좋았어.“      

  민희가 라디오 방송국에 보낸 '영화페스티벌 개막 무대 초대 응모권'이 당첨되었다. ’응모권‘은 영화 잡지에서 민희가 얻은 것이었고, '응모권'을 붙인 엽서 한 귀퉁이에 단비가 눈에 잘 띄도록 간단한 그림까지 그려주었으니 단비도 당첨에 나름 역할을 한 셈이었다. 단비는 처음 가수의 공연을 볼 수 있게 되어 설레었다. 단비는 언젠가 영경이가 B 여고에 온 것에 대해 ’운이 안 좋았다‘고 푸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민희와 친해진 단비는 영경이의 말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다. 단비는 B 여고에 오게 돼서 너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단비는 민희와 함께 이야기하고 노는 것이 좋았다. 쉬는 시간엔 여전히 다른 아이들과 주로 떠들고 놀았지만, 단비는 민희와 방과후에 학교 근처를 자주 쏘다니곤 했다. 단비는 민희와 같이 겪는 모든 일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눈 오는 날 미끄러져도 웃음이 나왔고, 비오는 날 흙탕물을 뒤집어 써도 즐거웠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진눈깨비가 날리는 토요일이었다. 단비와 민희는 당첨되어 입장권을 받은 공연을 보기 위해 학교에서 걸어서 삼십 분 정도 거리에 있는 극장을 찾아갔다. 그날 무대는 정식 콘서트가 아니라 영화사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앞서 열리는 개막 무대였다. 단비와 민희는 극성스럽게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가서 무대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지만, 공연은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거의 두 시간을 서서 사람들과 몸싸움을 하면서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가수들이 무대에 올랐을 때는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고, 스피커 바로 옆에 있어서 고막이 찢어질 듯 울리는 소리 때문에 귀를 막고 음악을 들어야 할 정도였었다. 또 눈앞엔 십 년 쯤 신은 롴커의 워커만 보였는데 무대를 향해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다섯 곡의 노래가 끝나고 극장에서 로비로 나왔을 때, 단비와 민희는 전쟁 피난민보다 못한 꼴로 극장 로비에 주저앉아 머리와 신발 끈을 고쳐 묶었다. 단비는 손목 근육에 무리가 간 거 같았고 민희는 허리가 쑤신다고 했다. 그래도 단비와 민희는 마냥 재미있어서 쉴 새 없이 낄낄거렸다.

  민희와 단비는 극장에서 나와서 근처 종로 거리를 다녔다. 민희와 단비는 '선물  가게'에서 인형과 볼펜을 샀고, 두 사람은 계속 종로의 부산스러움을 벗어나기 위해 남산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특별히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자동차와 사람들이 몰려다니지 않은 방향으로 간 것뿐이었다. 또는 볼만한 건물이 있을 것 같은 길을 좇아갔다. 두 사람은 어느덧 인사동과 관공서 건물들이 있는 거리를 지나 고요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한 북촌 골목을 다녔다. 당시 그 동네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거리였고 가게도 많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한옥들이 모여 있는 골목 어귀에는 동네 사람들이 써놨을 것 같은 '개발 제한 철폐'라고 대충 갈겨 쓴 종이가 보일 뿐이었다. 큰 길에 나와야 한옥이 아닌 이 삼 층 정도 되는 현대식 건물도 눈에 띄고 사람 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비와 민희는 말없이 골목 깊숙한 곳을 그냥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젊은 두 남자가 불쑥 전봇대 뒤에서 튀어나와 단비와 민희의 길을 가로막고 말을 했다.      

  "무슨 일로 오셨죠?"


  단비와 민희는 자신들의 길을 막아 선 두 남자의 등장에 깜짝 놀랐고, 당황스러웠다. 민희가 대답을 했다.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인데요."     

  두 남자가 눈빛을 교환하며 민희와 단비 앞으로 더 다가섰다. 단비의 눈에 한 남자의 손에 쥔 무전기가 보였다. 단비는 무서워 민희의 소맷부리를 잡아끌며 뒷걸음질 쳤다. ’뛰자‘ 혹은 ’도망가자‘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런말은 무서워서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두 남자가 뒷걸음질 치는 단비와 민희를 쫓아가기를 포기하고 대충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민희와 단비는 뒤를 돌아 뛰고 또 뛰었다. 남자들이 민희와 단비를 쫓아오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단비와 민희는 한참을 뛰어서 북촌 마을을 빠져나왔다. 단비와 민희는 버스가 다니는 길에 다다랐다. 뒤따라 오던 민희의 목멘 소리가 단비를 세웠다.      

  "야, 왤케 뛰는 거야?"

  "헉헉. 잡아 갈 꺼 같으니까."

  "누가 보면 죄지은 줄 알겠다. 우리 죄 없어."

  "근데 그 남자들 뭐야?"

  "사복 경찰인가 전경인가 잖아"     

  단비가 골목에서 봤던 남자들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 남자들 말고도 그 동네 골목길 구석엔 수상한 남자들이 더 있었던 것 같았다. 검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사람도 있었고, 짧은 머리에 청바지와 청재킷을 입은 남자들도 있었다. 단비와 민희에게 다가왔던 남자들은 청바지를 입었는데 옷이 몸에 크거나 작지 않았음에도 꼭 남에 옷을 빌려다 입은 것처럼 보였었다.      

  "그런 사람들이 왜 거기에 있는 거야?"

  "청와대가 근처에 있잖아." 


  단비는 뉴스에서 '청와대'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다. 하지만 그렇게 가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 했었다. 청와대는 어딘가 훨씬 더 먼 곳에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 동네가 조용했던 건가?"

  "그렇지. 딴 동네는 옛날 집들 다 부스고 신식 건물 짓고 그러는데, 거긴 개발제한 구역이니까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던 거지."     

  민희가 어른처럼 말을 했다. 그 이상한 동네에 관한 이야기는 거기서 멈췄다. 단비와 민희는 걷다 보니 인사동 거리까지 나와 있었다. 진눈깨비는 이미 두세 시간 전에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이어서 낮도 밤도 아닌 오후였다. 이상한 하루였다. 민희가 단비를 이끌고 골목에 있는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 추워서 어딘가 들어갈 데를 찾기는 했지만, 카페에 들어갈 줄 몰랐던 단비는 당황스러웠다. 민희와 있으면 단비는 처음 해보는 것이 많았다. 콘서트 관람이 그랬고, 커피나 카페가 그랬다. 


  단비와 민희가 카페 안에 들어서자, 카페의 여주인은 두 사람, 그중에서도 민희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민희는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에 카페 주인이 단비와 민희 쪽으로 다가와서 뚝배기처럼 생긴 투박한 사기그릇을 탁자 위에 놓고 갔다. 단비는 그 그릇이 뭔지 몰라 신기한 듯 보다가 물 대접인가 싶어서 물병을 찾았다. 선물의 가게에서 산 물건들을 뜯어 확인하던 민희가 단비가 하는 양을 보고 말을 했다.      

  "재떨이잖아.”

  "아...."     

  뜻밖에 단어를 들으니 단비는 무안했다.     

  "여기 사장님 너무 하시네. 우리가 대학생들처럼 보이나?"

  "다른 고등 애들이 많이 피고 나갔다는 소리겠지?"

  "글세. 담배는 안 펴 봤니?"

  "안 펴 봤어. 넌?"

  "중학교 때 입담배 좀 빨다가 집어치웠어. 아깝잖아."

  "잎담배?"

  "이파리가 아니라 입. 연기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만 머금었다가 뱉어내."

  "아...."  


  두 사람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바깥을 보면서 한동안 커피만 마셨다. 민희가 대뜸 입을 열었다.      

  "방학 때 뭐 할 거니?

  "글쎄."

  "난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할 거야. 우리 가게에 손님으로 오는 삼학년 언니가 소개해주기로 했어."


  학교에서 맨 날 엎드려 있는 민희에게 아는 선배가 있다는 것이 단비는 신기했다.      

  "너희 가게도 봐야 하지 않아?"

  "비디오 가게는 봐봤자 엄마가 돈을 안 주잖아."

  "방학 때만 일할 수 있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

  "돈 벌면 뭐 할 건데?"

  "마이마이랑 옷을 살거야."

  "나도 같이해도 될까?"

  "넌 집에 잘 말하면 되지 않니?"

  "알았어. 근데 나도 돈이 필요해. 푯값."     

  단비는 민희가 무슨 푯값이 필요한지 물어봐 주길 바랐으나 민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여수행 기차표랑 미국행 비행기 푯값을 마련하고 싶어."

  "아서라. 내가 괜한 이야기 해서 애 버려놨네."

  "왜?"

  "미국 비행기 값 벌려면 졸업하고 제대로 돈을 버는 게 더 빠를 거야. 그냥 공부하는 게 낫지."


  실내에 있다 보니 차가웠던 몸이 따듯해져서 기분이 나른해졌다. 단비는 문득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가 떠올랐다. 내용도 재미있었지만, 삽화들만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어렸을 때 봤던 동화책이 있어. 좀 이상한 펭귄이 주인공이었는데...."  

  "어떻게 이상한데?"

  "남극이 자기 집인데 얼음과 추운 날씨가 너무 싫었던 거야. 그 펭귄은 늘 혼자 였어. 그러다가 북쪽에서 날아온 새들한테 북쪽엔 따듯한 열대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거야."

  "그래서?"

  "열대로 가서 살기로 했어. 그리고 마침 작은 빙산이 육지에서 쪼개져 나가는 것을 봤어. 펭귄은 ’기회는 이때다‘하고 빙산에 올라탔어. 그리고 빙산을 배로 삼아 해류에 떠내려갔어. 그러다가 적도의 섬에 도달한 거야. 거기서 그 펭귄은 혼자서 즐겁게 살았다는 이야기야."

  "그게 끝이니?"

  "응. 난 그 책의 삽화를 좋아했어. 선글라스를 낀 펭귄이 야자수 아래에 서서 코코넛 주스를 먹고 있는 그림이야. 듣기만 해도 따듯하고 유쾌하지 않아?"     

  단비는 열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면서 이야기했고, 민희는 그런 단비를 보고 있었다. 민희는 단비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서 하고 싶어졌다.     

  "근데 그 이야기는 거기가 끝이 아니야."

  "어떻게?"

  "잡지에서 읽었는데, 진짜로 적도에 사는 펭귄이 있데. 아마 그 추위를 싫어하는 펭귄은 혼자 살아야 하는 줄 알고 열대 섬에 왔을 거야. 그리고 혼자 바닷가를 산책했겠지. 그런데 열대 섬에서 살고 있던 또 다른 펭귄과 우연히 만나는 거야."

  "그래서?"

  "같이 친구가 돼서 즐겁게 지내는 거야." 

  "좋은 결말이다.“     

  민희는 테이블 위에 커피잔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근데 현실에서 그런 결말이 있을까?”


  민희의 말에 단비는 대답할 수 없었다. 시간이 되어 놀이기구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단비는 어른은 아니었지만 어린아이도 아니었다.     

  "민희야, 너 바닷가에 가본 적 있니?"

  "없어."

  "우리 언제 바닷가에 가지 않을래? 먼바다."

  "네가 원한다면."     

  단비와 민희는 카페에서 나와 헤어져서 집으로 갔다. 단비가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갈 때 눈보라가 쳤다. 행인들은 추위에 옷깃을 세우고 종종걸음으로 갈 길을 갔다. 하지만 단비는 추위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단비의 마음속에서 민희와 보낸 하루의 기억이 따듯한 열을 내서였는지도 몰랐다.      

이전 14화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