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9. 민희네 비디오

9. 민희네 비디오     


  동찬의 아파트엔 전화가 두 대였다. 거실 전화는 번호를 바꾸지 않고 쭉 쓰고 있었고, 김 여사도 번호를 알고 있는 전화였다. 다른 한 대는 안방에 있었는데, 윤숙이 개인적으로 쓰는 전화로 별다른 이유 없이 전화번호를 자주 바꿨다. 괴상한 짓거리였지만 유윤숙의 사생활이었다. 윤숙은 시댁 식구들이 자신의 집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그리고 윤숙은 그렇게 바꾼 전화번호를 단국이와 동찬에게만 알려주고 단비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단비는 굳이 그 전화번호를 알려 하지 않았다.

  일 학년 늦가을, 그해 마지막 제사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때르릉' 오전 내내 동찬의 아파트 거실에선 전화 신호음이 울렸지만,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숙과 단국이는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집엔 전화가 두 대였다. '때르르릉'. 단비는 방에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거실로 나온 단비는 계속 울리는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보나마나 할머니, 김 여사의 전화였다. 전화 울리는 소리가 끊어지자 그제야 좀 숨을 쉴 수 있었다. 다시 전화기가 울리면 전화기를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단비는 그날 오후 김 여사네 집에 간다는 사실도 말해야 했고, 시장에 들러 사갈 물건들도 물어봐야 했다. 단비는 김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이 사니까 좀 알 꺼 아니냐?"

  "그 전화번호 한 달 전에 바꿨고 나는 모른다니까. 정 궁금하면 아빠 회사로 전화하든가." 

  "바쁜 사람한테 뭣 헐라고."     

  김 여사와의 답답하고 짜증나는 전화통화를 끝낸 단비는 거실 전화기의 전기 코드를 뽑아 버렸다. 도대체 왜 제사를 지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단비는 김 여사를 보러 가야했다. 


  단비는 시장에서 몇가지 식재료를 사들고 김 여사 집을 향해갔다. 오르막 길을 더 가면 계단이 나오고, 길옆으로 좁은 골목들이 여러 개 나왔다. 비탈진 길 양옆으로 늘어선 집들과 가게들,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거리 모퉁이, 예전에 단추를 만드는 가게가 있던 자리에 새 가게가 들어와 있었다. 비디오 가게였다. 단비는 김 여사와 같이 살면서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김 여사 방에는 동찬이 갖다 놓은 비디오 기계가 있었지만, 실제로 사용한 일은 거의 없었다. 명절에 동찬이 오면 본인이 나오는 뉴스 녹화 테이프를 몇 번 돌려 보는 정도로만 쓰였다. 그 가게 앞면엔 온통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어서 안을 볼 수가 없었다. '각종 월간지 있음'이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었다. 가게 위에는 ‘민희네 비디오’라는 플라스틱 간판이 당당하게 붙어 있었는데, 단비는 가게 이름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했다. 단비는 가던 길을 멈추고 영화 포스터에 이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산대에서 잡지를 보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 민희잖아!" 

  "오단비."     

  교복을 입지 않은 모습이 어색하다는 듯 단비와 민희는 서로를 훑어보았다. 그렇지만 곧 두 사람은 반가움을 나타내는 미소를 주고 받았다. 교실 안에서 거의 말을 안 한 사이였는데, 신기하게도 단비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친구 사이 같은 친근감을 느꼈다. 민희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 자리 옛날엔 단추 도매였었는데."

  "작년 겨울에 이사 왔어. 이 동네에 살면 봤을 텐데.“

  ”작년까지 살았었어. 그래도 할머니가 사셔서 이 동네에 자주 오는데 이쪽 길은 가끔 다니는 길이거든.“

  ”아.“ 

  ”오늘도 할머니 집에 일이 있어서 온 거야.“

  ”영화 볼라고?“

  "그냥 지나가다가 포스터가 멋있어서...."

  "이쪽이 최신작이야."     

  작은 가게 안은 삼면이 영화 비디오가 천장까지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계산대 옆엔 작은 식탁과 의자가 있었다. 단비가 제목을 훑어보았는데 벽에 너무 많은 테이프가 꽂혀 있어서 선뜻 고를 수가 없었다. '쿼바디스'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E.T' 같은 누구나 아는 영화 제목들도 있었고, 티브이 시리즈나 내셔널 지오 그래픽스의 자연 다큐멘터리도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까미유'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고, 단비는 그 비디오 테이프를 빼들었다. 재작년 즈음에 '까미유'라는 영화 비디오가 동찬의 아파트 거실에서 굴러다녔었다.      

  "그 영화 보려고?"     

  민희는 처음에는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이었으나 곧 상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안 돼?"

  "안 될 거야 없지만. 영화 많이 보니?"

  "아니. 극장에는 가봤는데 비디오는 한 번도 안 봤어."

  "그래? 일단 나는 프랑스 영화는 피해." 

  “왜?”

  “어려우니까.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들도 다 그렇게 말해.”

  “그럼 뭘 봐야하지?”
   

  민희가 자신의 뒤쪽 칸에서 꺼내 준 영화는 '영웅본색'이었다. 단비도 라디오에서 주제 음악도 들어봤고, 줄거리도 대충 들어서 아는 영화였다.      

  "이것도 나온지 벌써 몇 년이 지났네. 그래도 이런 게 낫지 않겠냐?" 

  "총 쏘고 피 튀기고, 우울할 거 같아."

  "얘가 잘 모르게. 진짜 우울한 영화는 ‘까미유’야. ‘영웅본색’도 결말은 그렇지만 총 쏘고 피 튀기고 그러면서 카타르시스가 있어."     

   민희는 잡지에서 직접 칼로 오려낸 장국영 사진을 단비를 향해 흔들어 보이면서 말을 했다. 민희가 보고 있던 잡지는 영화 월간지였다. 단비는 계산대 옆 책장에 꽂혀 있는 잡지들에 눈이 갔다. 패션과 영화 쪽 월간지들이었다.      

  "그리고 장국영이 나오잖아. 그걸로 끝이지. 내가 칼로 오린 거야.”

  "빌려주는 물건인데 사진 오리면 안 되지 않냐?"

  "엄마한텐 손님이 그랬다고 하면 돼지."


  단비는 웃음이 나와서 큭큭 웃어보였다.      

  "잡지, 보고 싶은 거 있니?"

  "아니."

  "잡지는 가게 매출에 큰 도움은 안돼. 내가 가게 볼 때 심심해서 사놓고 빌려주는 거야. 그리고 잡지 대여가 은근히 짭짤한 게 잡지 부록이 다 내 거가 되거든."     

  민희는 잡지 부록으로 받은 지갑도 흔들어 보였다. 단비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민희와 단짝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민희, 너 나 교실에서 무시하던 거 기억나냐?"

  "언제?"

  "내 연습장 만화 볼 사람 없냐고 내가 네 앞에 가서 그랬는데, 너 잠자는 척하고 그랬잖아. 맞지?"

  "니가 나대니까 그렇지." 


  민희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그런데 단비는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민희가 계속 말했다.      

  "애들이 보는 연습장 봤어. 그림이 만화랑 정말 똑같더라. 근데 우리 집이 옛날에 만화방을 해서 나는 웬만한 만화 다 봤어. '알레그로 연애' 도 전 권 다 완주했고."

  "진짜?"

  "지금도 집에 가면 처분 못 한 만화책들이 꽤 있어. 보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 집에서 찾아봐 줄게."

  "나중에 생각나면 학교에서 말해도 돼?"

  "응"

  "근데 너 오늘만 가게 보는 거니? 아니면....."

  "맨날 학교 끝나면 여기로 와. 일요일도 가게는 주로 내가 보고."

  "그랬구나."

  "아, 너 커피 마실래?"


  민희는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포트로 물을 끓였다.      

  “단 거 좋아하니?”

  “니가 하고 싶은 대로해. 아니, 나 단 거 안 좋아해.”


  단비는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지만 어쩌다 맡아 본 커피향ㅣ 좋아서 커피 맛이 궁금했었다. 민희는 단비의 커피에 설탕을 두 숟갈을 넣었고, 자신의 커피에는 네 숟갈의 설탕을 넣었다. 단비는 민희가 건네준 커피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셔봤다. 설탕 때문에 달짝지근했지만 커피의 맛은 쓰고 자극적이었다. 아무래도 처음이라서 그런 것 같았는데 두 번, 세 번 마시면 그 맛을 알 것 같았다. 단비는 커피를 맛 보면서 민희의 성격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고 민희 엄마가 손에 봉투를 여러 개 들고 가게에 들어섰다. 시장에 다녀온 듯 보였다. 엄마가 가게에 나타나자 그전까지 단비에게 쏠려있던 민희의 관심은 급속히 엄마에게 옮겨 갔다.      

  "엄마, 내 친구야. 우리 반이고 이 동네에 할머니가 산데."

  "오단비라고 합니다."

  "그래. 떡볶이 좋아하니? 양이 많은데 잘됐다. 먹고 가라."     

  민희 엄마가 테이블 위에 떡볶이와 순대가 담긴 비닐봉지를 펼쳐 놓았다.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먹기 시작했다.      

  “'사랑의 메신저' 빌려 간 손님 말이야. 내가 전화로 독촉하니까 아까 반납하러 왔어. 근데 마그네틱 선이 좀 상했더라고. 그 사람한테는 최신작은 빌려주지 마. 내가 그 사람 이름에 빨간 동그라미 쳐놨거든. 그리고...."      

  민희는 엄마와 살갑게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족이기는 하나 교실에서는 남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은 민희가 학교 밖에서는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반면 단비는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잘도 떠들었지만, 집에 있을 때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방에 엎드려 라디오로 음악을 들으면서 만화 베끼기만 할 뿐이었다. 단비는 죽을 때까지 라디오와 연습장만 끼고 살 것 같았다. 다른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친한 민희의 모습은 단비에게 묘한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단비는 민희 어머니한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단비가 김 여사의 집 문턱을 넘었을 때, 김 여사는 초상화 속 인물처럼 단정하게 마루에 앉아 있다가 단비를 맞아 주었다. 종교인 못지않은 수행의 일상을 보내는 김 여사 때문에 집은 정갈했고 고요했으며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마당 화분의 식물들은 지난번에 왔을 때에 비해 많이 자라 있었지만, 집안은 변한 것이 없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집은 도심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산중 벼랑에 위태롭게 세워진 암자 같았다. 하지만 단비는 십수 년 수도를 한 김 여사의 마음속이 수행자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에게 받지도 않은 전화를 십 년째 하는 김 여사의 마음이 수행자의 마음일 수는 없었다. 김 여사는 여전히 욕망의 올가미에 갇혀 몸부림치는 가엾은 동물이었다. 김 여사의 집은 그녀의 집착과 함께 조용히 부스러져 가고 있었다. 김 여사는 단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루에 앉아 서쪽 하늘의 주홍빛 노을만 보았다. 

  밤이 되자 단비는 마당 구석에 있는 자신이 쓰던 방에 누웠다. 방은 연탄을 안 때는 계절엔 바닥으로부터 습기가 올라와 축축했고 특유의 창고 냄새가 났다. 그 방에서 지냈던 겨울 생각이 났다.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추운 겨울날엔 발바닥은 뜨거워 서 있을 수가 없는데, 찬 기운이 천장과 창으로부터 밀려 들어왔다. 단비는 새삼 그 방에서 자신이 수년 동안 불평 없이 살았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 방은 유원지의 철이 지난 손님이 뜸한 민박집처럼 쓸쓸했고 불편했다. 단비는 그 방에 묵어가는 손님일 뿐이었다. 단비는 '엄마의 이모'로부터 온 편지와 엄마의 전시회 팜플렛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아파트 방의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두어서 당장 볼 수 없었다. 단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도 켜지 않은 채 방을 서성였다. 당장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단비는 메모에 가까운 짧은 편지 내용을 거의 똑같이 암송할 수 있었다. 단비는 동찬이 회사에서 김 여사 모르게 황주미 친척과 연락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미는 잘 있습니다. 다만 옛날에 광에 두고 온 그림을 다시 찾고 싶다고 했습니다. 혹시 아직 남아 있다면 여수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단비의 눈엔 파도가 넘실대던 초록빛 바다가 아른거렸다. 마침내 황주미의 그림 속에서 봤던 빛깔들이 오로라처럼 단비 눈앞에 펼쳐졌다. 단비는 민희네 비디오 방에서 나온 이후 줄곧 엄마를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전 13화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