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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8-2. 외인부대

8-2. 외인부대


  단비네 반에서 아이들이 '암울 삼종 세트'라고 이름 붙인 선생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선생님 쪽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었다.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아이들은 그 사람들이 최악의 선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선생님들도 직장인이고 수업만 제대로 한다면 뭐라 꼬투리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학생들의 별명 붙이기 놀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암울 삼종 세트는 지리, 영어, 수학 선생이었다. 

  지리 선생은 얼굴 모습만 보면 교장보다도 더 나이 들어 보였고, 팔뚝에 토시를 하고 교실에 들어왔다. 일제시대 관청 서무과에서 주판을 튕기는 주임 같은 모습이었다. 양복과 와이셔츠가 딱 두 벌이어서, 소맷부리가 닳을까 봐 토시를 끼고 다닌다고 했다. 그가 왜 궁색한 모습으로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지구상에 얼마나 다양한 지리적 환경이 있는지에 관심은 전혀 없었고, 입학시험에 잘 나오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그의 수업 내용은 참고서를 줄줄 읽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고, 그래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 옹색한 차림새만 보면 그를 동정하고 싶어져서 아무도 그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중년을 지나 정년퇴임이 가까워 보이는 영어 선생님은 집에 우환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얼굴이 항상 어두웠다. 얼굴을 언제나 잔뜩 찌푸리고 있어서 진한 눈썹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고, 면도를 하다만 듯한 턱의 수염은 안 그래도 수심 가득한 얼굴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그도 학생들 얼굴은 안 보고 혼자서 수업을 하다가 나가기 일쑤였다. 물론 그가 아무리 잘 설명을 하려고 해도 애들 태반이 영어 수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언제인가는 참다못해 한 번 크게 소리치며 학생들을 야단친 적이 있었다.      

  "너희가 그 좋았던 학교를 망쳐 놓은 거야! 얼마나 좋았는 줄 알아?"     

  영어 선생은 그 말을 한 번 했는지 몰라도 애들은 그 소리를 여러 교사들한테 들어야 했다. 어떤 교사는 그런 소리를 여러 번 했었다. 아이들 입장에서 안타까운 것은, 선생들이 좋았다는 그 시절은 시험을 봐서 고등학교를 오던 시절이었다. 상위권 애들은 '내가 그 시절이면 이 학교 안 온다'라는 눈초리로 선생을 보았고, 나머지 애들은 그 옛날과 지금을 왜 비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 번째는 ‘칠면조’ 수학 선생이었다. 그는 열성적으로 수업을 했으나, 대부분의 애들은 수학이라는 과목은 일단 포기하고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가 신경질이 나서 아이들을 향해 핏대를 세우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딴짓을 하다가도 갑자기 선생님 얼굴에 집중했었다. 화를 내는 선생님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의 표시가 아니라 불안감과 조바심 때문이었다. 화가 나서 검붉게 변하거나 푸르게 변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당장 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교무실에서 갑자기 호흡 곤란으로 쓰러지더니 사망했다. 아이들은 교사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자신들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공포감을 느꼈다. 수학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아이들은 ‘우울 삼종 세트’에 새로운 인물을 갖다 붙였다. 

  새로운 인물은 물리 교사였는데, 이 여자는 다른 ‘우울 삼종 세트’와는 매우 달랐다. 사십 대 초반의 물리 선생은 원래 유복한 집 출신에 시댁도 부잣집이어서, 중형 자동차를 몰고 학교에 출근했다. 근데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꼭 운전 보조석에 자신이 키우는 사람만한 푸들을 태워 데리고 왔다. 그 강아지는 주인이 일하느라 바쁜 시간에는 학교 주차장 옆, 수위실에 맡겨졌다. 단비는 미니 푸들 종류만 봐와서 그렇게 커다란 푸들이 있는지 몰랐었다. 그 푸들은 물리 교사가 모는 고급 자동차나 그 여자가 입고 온 고급 브랜드의 옷보다도 그 여자의 여유로운 생활을 더 잘 보여주었다. 학생들은 업무시간에 자신의 애완견을 학교에 데려 오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귀족스런 풍모를 뽐내는 개에게 반해버려서 물리 선생님에게 강아지 칭찬하기에 바빴다. 운동장 구석에 나와 있는 개를 보면 쓰다듬어주기에 정신없었다. 머리 모양마저 옆머리를 늘어트리는 파마를 해서 푸들처럼 보였던 물리 선생님은 강아지를 사랑하는 긍정적이고 밝은 인격체답게 수업했다. 웃는 얼굴로 미용실 간 이야기와 대학 시절 이야기, 생활하면서 겪는 소소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자신의 생활 이야기를 할 때는 눈빛은 빛났지만, 물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의 눈빛은 생기를 잃고 늘어졌다. 교사의 겉모습과 교사가 맡은 학문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녀는 인생에서 한 달이라도 뉴턴이 말한 ‘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진지하게 물리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것은 사무적인 말투였다. 그녀의 표정은 '세상 과학 선생님은 모두 과학에 심취해야 하나요? 그것만큼 논리에 벗어난 생각이 어디 있죠?'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그것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상식’이었다. 물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단비와 아이들은 물리 선생님을 싫어하지 않았다. 어두침침한 분위기의 교사가 많은 B 여고에서 그 여자는 나름 소중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해 뵈는 얼굴에서 단비와 아이들은 때론 우울함을 느꼈다. 단비와 학생들은 그녀의 수업에서 어떤 감동도 느끼지 못했었다. 묘하게도 그녀는 암울 삼총사의 한 명이었다.      

  물론 모든 교사가 그렇게 자신이 맡은 과목에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국사 교사, 허현식은 평생 동아시아 역사와 한국 역사에 관심을 유지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수업시간엔 학생들이 역사에 흥미를 갖도록 노력했다. 허현식은 고대사를 가르치는 시간에 고구려 건국에 관여했고 온조와 비류 두 아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 소서노의 이야기를 꼭 했다. 소서노는 적어도 두 개의 나라를 세운 우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고대사가 기록이 많지 않아 역사와 신화의 경계가 불분명한 상태에 있다보니, 소서노 이야기는 신화의 영역으로 평가받아서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소서노 일생은 극적인 재미가 있었고, 여학생들에게 진취적인 기상과 꿈을 주는 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B 여고의 아이들은 시험에 안 나오는 부분이라면서 그 이야기는 듣자마자 잊어버렸다.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허현식은 자신이 수업에 기울였던 모든 노력이 헛짓거리라는 생각 밖에 안들었다.

  허현식은 며칠 전에 학교 서쪽 담장 허물어진 곳에 시멘트를 덧발라 공사를 하는 것을 보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B 여고의 서쪽 담장과 뒤뜰은 조선 말기 궁궐 부속 건물의 일부였다. 왕가 여인들이 사는 곳은 아니었고 나인들이 거처하다 보니 중요문화재는 아니라고 해도 엄연히 문화재였다. 그런데도 학교 재단은 흉물스럽게 옛 돌들 위에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 대충 공사를 마무리했다. 학생을 가리키는 학교 재단이 문화재가 무엇인지 전혀 생각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 강의해야 할 분량을 끝낸 허현식은 학교 주변이 과거에 어떤 곳이었는지 이야기했다. 조선 후기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살았던 집들이 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걸어서 십 분만 가도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도 여럿 있었다. 그는 아예 옛 한양 지도를 칠판에 그리면서 설명했다.      

 "여기 북악산과 남산 사이, 청계천이 흐르는 이 땅이 사대문 안이자 한양이란 말이지. 청계천이 특이하게 이렇게 흐르는데 남쪽 건너편이 남촌이고 반대 건너편은 북촌이야. 남촌엔 주로 벼슬에 나가지 못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고, 북촌은 궁궐이랑 가까우니까 세도가 양반들이...."     

  학생들로부터 그리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는 꾸준히 주변 지역과 역사의 연관성에 관한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했다.     

  "청계천 주변으로는 중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광통교가 여기쯤 있었고, 여기 있는 게 운현궁인데, 이름을 풀어 보면 구름 언덕이야. 이십 년 전엔 말이지, 유명한 사립고등학교들은 다 이쪽에 몰려 있었어.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재단에서 세운 학교도 많아."

  "우리 학교 재단도 그렇죠?"


  국사 선생님 턱 밑, 맨 앞자리에 앉은 영경이가 한마디 했다. 잠시 허현식의 얼굴에 '하필 왜 그걸 묻냐'는 듯 난감한 표정이 살짝 스쳤다.     

  "에... 학교를 세운 분들은 시대의 흐름을 빨리 파악하고 앞서나간 선구자라 할 수 있지. 그런 그렇고, 옛날에 우리 학교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던 다른 학교들은 죄다 이사 갔어요. 우리 학교는 그냥 있지만. 과거에는 학생들이 좋은 학교를 찾아왔지만 이젠 학교가 학생들이 있는 동네를 찾아가야 하는 시대가 온 거지."     

  허현식은 자신이 왜 학교 재단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평소 논리정연하던 분위기를 벗어나서 감정적으로 흘러갔다.     

  "우리나라는 문화재 관리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어. 그 예가 바로 내가 엊그제 본 우리 학교 옆 담장이야.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학교 건물은 조선 말기에 지어진 궁궐 부속 건물이야. 근데 담장 구석이 좀 허물어졌다고 학교는 시멘트로 발라놨더라고. 뭐 우리 학교 재단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옆 학교 운동장 구석에 조선 후기에 정승을 지낸 김**가 심은 나무도 학교 측이 공사한다고 무리하게 땅을 팠다가 죽었죠.“      

  그때 다른 애 하나가 끼어들어 말을 했다.      

  "선생님. 우리 학교 뒤뜰의 우물, 시멘트로 막았어요. 거기에 조선 시대에 궁녀들이 빠져 죽었다면서요."

  "그런 설이 있지.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니네 선배들 중에...."  


  허현식이 엄숙한 분위기를 걷어 내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아이들은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복도로 귀신 나와요.“

  "막아놔도 귀신이 우물에서 기어 나온다는 데요."

  "무서워요."

  "복도 천장에서 물 새는 자리가 귀신 나오는 자리래요."     

  단비가 시계를 보니 수업 끝나기 일 분 전이었다. 조선 후기 한양 지리와 문화재에 대한 고상한 얘기는 귀신 얘기로 허무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날도 있기 마련이었다. 재미없고 답답한 지리, 영어 수업에 비하면 귀신 얘기라도 나온 국사는 꽤 재미있는 수업이었다. 그러나 그때 어떤 애가 실수로 부적절한 말을 하고 말았다.


  "졸라 무서워요."     

 이어서 국사 선생님의 입에서 애들을 놀라게 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이 학교 애들은 왜 이렇게 천박한지 모르겠어!"     

  교실에서 나가려고 출석부를 만지작거리던 국사 선생님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스쳤다. 귀신 얘기에 생기가 돌던 아이들은 국사 선생님의 표정에 순식간에 질려버렸다. 그의 얼굴은 여고생들이 이런 말을 쓰는 것을 아예 본 적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정말 처음 본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단비는 어이가 없었다. 교실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자 '졸라'라고 말한 애는 당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허현식은 무엇인가 더 모욕적인 말을 생각하려는 듯 보였으나 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차갑게 그 아이를 째려본 다음 교실을 나갔다. 국사 교사가 교실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얼마 동안 교실은 조용했다. 그때 반 아이들이 그 아이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면서 말을 걸었다.     

  "야, 니가 잘못한 거 없어. 국사 완전 이중인격자야."  

  "뭘 그렇게 모르는 척하는지 모르겠어."     

  아이의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다소 풀렸다. 비로소 반 분위기도 쉬는 시간답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이 목소리 높여 떠들기 시작했다.      

  "완전 백조 아니냐? 겉으론 우아한 척 물 위에 있는데, 물속에선 양쪽 발을 이렇게 엄청 저어야 한다는 거지."

  "딱이네. 혼자 고고한 척하는 거."     

  점심시간이어서 교실은 자리를 옮겨 다니며 밥 먹는 아이들과 밖으로 나가는 아이들로 시끄러워졌다. 밥을 다 먹은 단비가 혼자 앉아 있었는데 영경이가 다가와서 단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럴 줄 알았어." 

  "뭐가?"

  "우리 언니가 우리 학교가 요 모양인 것이 재단 탓이랬어. 근데 국사, 우리 언니도 아는 뻔한 사실을 딱 부러지게 말못하고 어버버하더라."     

  영경이의 언니는 B 여고 졸업생이었고, 영경이만큼 공부를 잘했었다. 단비는 왠지 국사 선생님을 위해 조금은 방어적으로 말하고 싶어졌다.      

  "수업시간이니까. 그리고 자기가 일하는 학교니까 좀 좋게 말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아니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려나"

  "문제는 무슨. 그냥 인간이 소심해서 그런 거지." 

  "근데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입만 열면 우리 학교가 십 년, 이 십 년 전에 좋았다는 말만 하지 않냐? 오 십 년째 똑같은 재단인데 왜 옛날에 좋았고 지금은 나쁘다는 거야?"

  "그땐 시험 봐서 애들 뽑던 시절이었고. 같은 강 씨라도, 교장이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럴까.....“      

  거기까지 말하고 영경이는 다른 애들과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날 수업 마지막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아이들은 계속 국사 선생, 허현식에 대해 험담을 했다.     

  "야, 국사가 졸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뭔데?"

  "조용한 자습시간에 코를 팽 풀거나 방귀 뀌는 사람. 그리고 쉬는 시간에 '똥 싸러 가자'라고 소리치는 애. 큭큭큭."

  "그때도 천박한 것들이라고 했냐?"

  "응. 근데 애들 앞에서 못하고 뒤돌아서서 중얼거렸대. 히히."      

  확실히 그날 단비는 국사 선생인 허현식에 대해 실망스러웠지만 그를 조롱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허현식의 수업시간에 듣는 이야기를 단비는 좋아했었다. 학교 주변에 있는 운현궁과 천도교 회관, 조선시대 고관들의 집터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단비는 가끔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이면 주변 동네를 걸어다니면서, 수업시간에 그가 말했던 건물들을 발견하면서 소소한 기쁨을 느꼈었다. 영경이나 다른 친구들과 같이 다닌 적도 있었는데, 단비 말고 허현식이 국사 시간에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 친구는 없었다.     

  종례시간이었다. 얼마 전에 본 영어 수학 과목, '전국 모의 학력평가' 성적표가 나왔다고, 담임 선생님이 성적표를 나눠 주었다.      

 "오단비, 이가희, 이영경...."     

   지난해까지는 이런 시험에 일 학년은 참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일 학년부터 자신의 수준을 알아야 한다는 항의가 있어서 학교가 일 학년도 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러나 종례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은 교실을 나서기 전에 쓰레기통 앞에 서서 성적표를 박박 찢어 버리고들 나갔다. 부모님들은 잘 모르는 시험이었고 그래서 집에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단비도 당장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교과서에 끼워 며칠 보관했다가 없애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이들이 대부분 집으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단비는 우물쭈물 학교 옆 문방구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 운동장 구석에 있는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운동장 모래엔 햇빛이 쏟아졌고, 본관 건물 위에 걸려 있는 ‘지덕체’라는 녹 쓴 쇠 간판마저도 금빛으로 빛났다. B 여고 학생들은 본인들을 ‘외인부대’라고 불렀다. 소문에 의하면, B 여고는 여러 동네에서 주소에 따라 배정될 때 배정되지 못하고 남는 아이들이 배정되는 학교였다. 그래서 비교적 멀리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애들도 많다고 했다. 학교 뒤쪽의 동네가 있다지만 그 동네 학생들은 B 여고에 다니지 않았다. 다른 학교에는 있는 열혈 학부모가 B 여고엔 매우 적었는데, 선배들은 그 이유가 학생들이 사는 동네가 여기저기 띄엄띄엄 있어서 엄마들이 뭉쳐서 학교에 뭔가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덕체’ 중 ‘체’를 유난히 강조하는 학교라고도 했다. 나름 '예리한' 진단이었다. 

  한참 그렇게 앉아 있는데, 운동장 한쪽에서 단비에게 손을 흔드는 영경이가 보였다. 그 시간까지 영경이가 왜 학교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영경이를 보니, 지금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은 단비밖에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비 옆에 앉은 영경이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자퇴밖에 답이 없다.”

  “어?”

  “학교 그만두고 학원이나 다니는 게 나을 거 같아. 너 구윤지, 양원희 알지? 걔들 중학교 때 나보다 공부 못 했잖냐. 둘 다 다른 학교로 갔고. 근데 이번 연합 모의고사에서 일등급에 전국 등수가 되게 좋게 나왔데. **대 영문과 합격 가능 등수라는 거야. 이 학교에선 불가능한 일인데.”

  “아직 일 학년이니깐 좀 더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학교에서 최근 이년 간 재수하지 않고 곧바로 **대에 붙은 졸업생이 없었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단비는 성적도 상위권이고 학교에서 늘 칭찬받는 쪽인 영경이가 자퇴 이야기를 꺼낸 것이 신기했다. 단비의 상식 속에 자퇴란 퇴학당할 만큼 큰 사고를 친 아이가 퇴학당하기 전에 어떻게든 좀 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처벌을 약화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몹시 가난하거나, 병약해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학생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자퇴였다. 영경이의 입장에서는 보자면, 속에 있는 말을 다른 애들한테 말해 봤자 공부 잘하는 애의 투정이라고 할 것이 뻔했다. 그래도 단비라면 자신과 초등학교부터 동창이어서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난 모의고사는 일 학년이라서 신경 안 써도 되는 줄 알았는데."

  "너는 예체능이니까 그렇지."     

  단비는 한 번도 미술을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영경이는 알아서 단비를 예체능 지원자라고 짐작했다. 단비는 속으로 놀랐지만 못 들은 척하고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근데 자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냐?”

  “부모님이 동의하면 돼.”

  “이상한 애들만 하는 거 아냐?”

  “아냐. 우리 언니 아는 애 중에 외국어 고등학교에 갔는데, 거기는 경쟁이 치열해서, 내신 등급이 너무 안 나왔데. 그래서 자퇴한 다음, 검정고시 봐서 대학 갔다고 하더라.”

  “우와....”

  "이럴 줄 알았으면 자퇴하는 한이 있어도 언니가 외고 시험 보라고 할 때 보는 건데. 괜히 등록금 비싸다는 소리에 겁먹어서. 단비야, 우리 중학교 정말 좋지 않았냐? 학교가 정말 학교 다웠어.”

  "어, 그렇긴 했어."     

  단비는 필요 이상으로 규율을 강조했던 S 여중 선생님들과 그 속에서 억눌려 살았던 날들이 떠올랐다. 단비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영경이에게 '아니, 넌 그랬는지 몰라도 난 아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그러던데 너 아빠 집에 들어갔다며?"

  "응."

  "그쪽 동네 학교 안 가고 왜 이 학교에 온 거야?"

  "미리 주소를 옮겼어야 하는데 뭐 그런 문제 였나봐. 알 수 없어."

  "너도 운이 안 좋았구나."


  우울했던 영경이의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영경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교문 쪽으로 사라졌다. 영경이가 사라진 후에도 영경이가 한 '너도 운이 안 좋았구나'라는 말이 단비의 귓가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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