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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언덕 깊은 집 (창작소설)

8-1.  외인부대

8-1. 외인부대     


  B 여고에 입학한 후, 일 학년 이 학기도 반쯤 지났다. 평화로우면서도 따분한 가을이었다. 동찬은 식탁에서 단비가 당장 집 근처의 K 고등학교로 전학이 될 것처럼 말하곤 했었지만, 본인이 바빠서 그런지 전학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 사이 단비는 B 여고에서의 생활에 무난히 적응했다. 김 여사 집에서 중학교 다니던 때가 불과 일 년 전이었지만 단비에게 그 시절은 아주 오래된 과거처럼 다가왔다. 김 여사 집에서 아주 멀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B 여고에서 김 여사의 집은 멀지 않았다. 영경이를 비롯해서 중학교 때 친구들 여럿이 B 여고를 다녔다. 

  B 여고는 시내에서 제일 붐비는 길 중 하나인 종로에서 겨우 한 구역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학교 앞으로는 버스와 차들이 다니는 큰 길이 있었고, 십 층이 넘는 건물도 주변에 여럿 있었다. 하지만 학교 주변은 도심의 부산스러움에 초연한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아마도 학교 뒤쪽에 있는 한옥 동네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그 동네는 왕래하는 사람이 적어서 산속 오솔길의 웅덩이처럼 고요했다. 어쩌면 근처에 섬처럼 흩어져 있는 비원, 종묘, 운현궁 같은 궁궐이 도심의 소음을 빨아들여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 동네를 걷다보면 평범한 사무용 건물조차 비밀스러운 사연과 음모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곤 했다.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 때와는 달랐다. 단비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교실에서 만화책을 볼 수 있었는데, 중학교 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S 중학교에서는 수시로 소지품 검사를 했고, 소지품 검사에서 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만화책이나 소설책 같은 것이 발견되면 교사들이 압수해버렸다. 연필로 그린 만화 컷들이 담겨 있는 단비의 '연습장'도 같은 이유로 빼앗기곤 했었다. 그런데 B 여고에서는 소설책이나 만화책 같은 학생 물건을 뺏는 교사는 없었다. B 여고 교사들은 그런 사소한 것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방송반을 맡은 국어 선생님은 단비의 연습장 그림을 보고는 방송반 게시판을 꾸미는 일을 맡아 달라고 제안을 할 정도였다. 덕분에 단비는 게시판과 무대 미술 담당으로 방송반원이 되었다. 중학교 때처럼 무조건 선생님들이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커서 그랬을까? 단비는 고등학생이 되자 선생님이나 학교의 처벌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B 여고는 웬만하면 학생들을 처벌하지 않는 학교였다. 규율을 지키라고 학생들을 들볶지도 않았다. 단비는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는 학교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반 친구들과도 비교적 쉽게 가까워졌다. 단비가 먼저 반 아이들에게 연습장을 보여주자 아이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단비에게 관심을 가졌다. 동찬이 미련을 못 한 K 고등학교로의 전학은 점차 단비의 머릿속에서 바라지 않는 일이 되어갔다. 

  그렇다고 단비가 B 여고에 대해 아무런 의문 없이 좋은 학교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B 여고는 특이하다 못해 괴상한 학교였다. B 여고엔 수업시간 이후에 남아서 하는 '강제자율학습'이 없었다. 이학년부터 원하는 학생들만 신청을 받아서 학교 도서실에서 공부했다. 모든 학교는 아니겠지만 시내 대부분의 인문계 학교들이 방과 후에 학생들을 저녁 아홉 시나 열 시까지 잡아 두고 공부시켰었다. 단비는 고등학교엔 ‘지옥의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애들만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남의 나라 일 같은 학교가 있었는데, 바로 B 여고였다. 단비는 그다지 입시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아니었으나 가끔 ‘입시’에 무관심한 B 여고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불안감을 느낄 정도였다. 어찌 보면 '반강제 자율학습'이 없는 B 여고의 모습은 ‘정상적’이라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은 모습일 뿐,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의도에 따른 상황은 아니었다. ‘자율학습’이 없는 이유는 교육철학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교사들이 학생들에 대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방과 후 자율학습’을 할 수 없을 뿐이었다. 

  B 여고는 봄이면 체육대회, 가을이면 합창음악대회에 축제까지, 반 학생들이 단체로 참가하는 행사를 빼먹지 않고 열었다. 이런 행사들은 B 여고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독 이 학교의 학생들은 분위기상 열과 성을 다해 준비했다. 처음에는 단비도 그런 행사들은 명목상 몇몇 학생들만 열심히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온 반이 몇 달 동안 진심 열심히 행사에 매달려 준비했다. B 여고는 졸업 후에 대학 가는 학생들의 숫자가 한 반에 사 분의 일 이하였다. 그러니 학생들이 특별활동이나 예체능 행사에 참여하면서 즐겁게 학교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대학 진학에 관심 있는 성적 상위권 학생들은 알아서 공부하면 되었다. 하지만 교사와 학생 모두 시내 다른 학교들과 다른 B 여고에 대해서 속으로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학교에 대하여 아이들은 학교 쉬는 시간에 태연하게 험담했다.      

  "니들 우리 학교 거쳐 가는 선생님들 중에 강 씨가 많은 거 알지?"

  "새로 온 가사는 이 씨던데?"

  "그 여자는 엄마가 강 씨래. 외가가 재단 친척."

  "그걸 어떻게 알아?"

  "지가 딴 반 수업시간에 말했어."

  "푼수."

  "새로 온 수학은 최 씨잖아. 그쪽도 엄마가 강 씨라는 거야?"

  "야, 수학은 정규가 아니라 임시잖아. 칠면조 때문에.“     

  ‘칠면조’라는 말에 일순간 대화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칠면조’는 단비네 반, 수학 선생님의 별명이었다. 얼굴색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것이 칠면조 같다고 그렇게 불렸다. 그는 정년퇴임을 일 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삼 주 전에 갑작스럽게 혈압이 올라 교무실에서 쓰러진 후, 곧바로 학교 옆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으나 사망했다. 돌아가신 선생님의 유족은 학생들의 조문을 받지 않았다. 다만 장례식이 끝난 다음 영구차가 평생을 몸담았던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다가 나갔다. 학교에 사람이 거의 없었던 늦은 오후, 단비는 본관 방송실 창밖으로 영구차가 운동장을 서서히 도는 광경을 우울한 얼굴로 보았었다. 학생들은 이주일 정도 자습해야 했고 학교는 부랴부랴 임시 교사를 구해야 했다.     

  "새로 온 수학 내년에 우리 학교로 정식 부임하는 건가?"

  "모르지. 올해만 땜빵하고 다른 선생님이 온다는 말도 있으니까."

  "그냥 쭉 우리 학교에 남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선생님은 꼭 다른 학교 가더라.“ 

  "야, 니들 같으면 우리 학교에 남고 싶겠냐?"

  "우리 학교가 어때서?"

  "그래. 나름 좋지. 보충 수업도 있는 둥 마는 둥이지. 학생 생활지도 하라고 닦달하는 교감도 없지."

  "기지배들 교실 마루바닥에 침 뱉지, 침 뱉는다고 주위 년들은 싸움 걸고 머리 끄댕이 잡지."

  "암. 분위기 좃 같은 거 유명하지."

  "클클클"     

  B 여고에서는 사소하지만 기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고, 학교 수업 분위기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른 학교에도 늘 면도날파, 칠공주파, 바바리맨 같은 소문이 있었다. B 여고도 그렇게 특별난 학교는 아니라고 단비는 생각했다. 하지만 단비는 교장을 볼 때마다 B 여고가 정말 특별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단비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누렸던 자유 중 하나는 점심시간에 잠시 학교에서 나갔다 올 수 있는 것이었다. B 여고도 다른 학교처럼 교칙으로 일단 학교에 오면 교사의 허락 없이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 학생들은 점심시간에 살금살금 눈치를 보면서 나다녀도 뒤탈이 없었다. 그날 단비는 학교 근처 만화방에서 빌린 만화책을 반납하고, 교문 밖을 나간 김에 군것질거리까지 사서 당당히 교문을 통과하여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본관 쪽, 교문 맞은 편에서 교장, 강경민이 걸어왔다. 큰 키에 작은 두상, 호리호리한 몸에 좋은 양복, 멀리서 보면 노년이지만 멋진 신사의 모습이었다. 분명 그는 그랬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 더 정확하게 눈을 보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대개 다른 인상을 받았다. 단비는 교장과 맞닥뜨린 순간 허락 없이 밖에 나갔다 온 것이 켕겨서 속으로 움찔했었고 군것질거리를 든 손은 등 뒤로 숨겼다. 그런데 교장은 학생을 향해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고 그냥 자신이 가던 길을 가버렸다. 그 순간 교장이 사무적으로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고, 학생들이 그냥 운동장을 오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학교 학생의 대부분은 교장이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냥 지나간다고 생각했다. 그 멍청한 눈빛은 선글라스라도 껴서 가리기 전엔 어떻게든 숨길 수가 없었다. 어쩌면 학생들은 입학식이나 조회 시간에 그를 대충 봤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상이 이미 마음속에 있는지도 몰랐다. 단비도 교장 맹추같은 눈빛을 보고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지나가 버린 교장의 뒷모습에 대고, 단비 옆에서 누군가가 뱉는 말이 들렸다.     

  "아우, 저 흐리멍덩한 눈. 뭘 먹으면 저렇게 될까."     

  그 말은 단비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단비 옆으로 최민희가 지나갔다. 약간 큰 키에 적당한 어깨, 장작개비처럼 뻗은 팔과 다리, 단단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단비는 강 교장에 관한 생각은 잊고 금세 민희에게 주의를 빼앗겼다. 그러나 평소에 교실에서 말을 한 사이가 아니라서 단비는 민희를 부를 수가 없었다.      

  교실의 자기 자리로 돌아온 단비는 민희 쪽을 봤다. 단비가 교탁을 중심으로 오른쪽 앞자리에 앉아 있다면 민희의 자리는 교실 제일 뒤쪽 휴지통 주위였는데, 대각선으로 가장 먼 거리였다. 단비는 그날 이전에도 교실에서 민희를 의식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단비는 민희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더구나 민희 주변에는 이상한 애들이 호위병처럼 앉아있었다. 툭하면 학교에 안 나오는 애가 민희 앞자리였고, 근처 여학교 애들이랑 밤에 골목에서 싸웠다는 소문이 도는 애가 짝이었다. 민희는 게네들과 친하지 않았다. 민희는 혼자였고 민희와 같은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아이도 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학교에 오면 조용히 있다가 가는 아이였다. 민희는 아이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것을 꺼렸다. 민희는 교실이든 학교 밖에서든 큰 소리로 떠들어서 아이들이 자신을 보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규율을 어겨서 선생님들이 민희의 이름을 부르도록 만드는 일도 만들지 않았다.

그래도 반 친구들은 민희에 관심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민희가 노래를 잘해서, 방과 후에 나이트클럽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는 말이 돌았지만, 본인에게 직접 물어봤다는 애는 없었다. 민희가 맨날 학교에서 엎드려 있는 것은 밤에 일해서 피곤해서라는 것이 반 아이들의 설명이었다. 그런 말들은 민희를 더욱 신비로운 아이로 만드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단비는 그런 말들은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상한 소문이 없어도 민희는 단비의 관심을 끌었다. 

  민희는 다른 쉬는 시간처럼 책상에 엎어져 있었고, '나 건들지마'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단비는 ‘비장의 무기’라 할 수 있는 연습장을 꺼내 들었다. 선생님이나 아이들한테 관심을 받고 싶을 때 단비는 늘 만화 연습장을 내보이면 성공했었다. 단비는 용기를 내서 일부러 민희 자리 근처까지 갔다.     

   "야, '알레그로 연애' 삼 권 새로 그렸거든. 볼 사람?"     

  단비가 일부러 민희 쪽을 흘끗 보면서 물었다. 주위의 친구들은 단비에게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나 민희는 다른 때 보다 더 몸을 웅크렸다. 단비는 민희가 관심 없는 척하는 것 같아서 살짝 실망했다. 그렇다고 민희에게 다가가서 자는 척하는 애를 깨울 수는 없었다. 실망한 단비는 연습장을 누군가에게 줘버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단비는 주위 친구들에게 교장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모두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우리 학교가 조회를 한 학기에 한 번씩만 하는 게, 국어가 훈화 말씀 원고를 써줘야 하는데 매번 못 써줘서 그런 거라네. 교장은 원고 못 쓰고."

  "옛날 국어 선생님이 써놓은 삼 년 치 원고를 번갈아 읽는다던데.”

  “그게 아니라 교장이 한글을 잘 못 읽어서 그러는 거래. 그거 들통날까 봐 웬만한 공식행사 연설은 다 교감이 하는 거고. 그래야 교장 소문이 안 퍼질 테니까.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띄어쓰기를 못 읽는 거?"

  ”학교 졸업하고 제일 기억 남는 거래. 교장이 띄어쓰기를 잘 못 일근 거. 큭큭큭“     

  조회 단상에서 강 교장이 말을 할 때 그는 학생들을 내려다 보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단상에 놓여 있는 원고를 읽었는데, 띄어쓰기를 이상하게 읽어서 학생들은 그가 뭔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단비는 말투가 어눌한 어른이려니 했었다.      

  "그러면서 교장은 어떻게 됐데? 교사한 거 맞을까?"

  "물려받은 거잖아. 재단 집안이니까."

  "대학 졸업장은 있을까?"

  "교육대학 나왔다잖아. 근데 전공이 포커였고, 부전공은 당구."

  "뭐? 푸하하하.”

  “도대체 뭐지?”  


  아이들의 짖고 까부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에 본 교장의 멍한 눈동자를 생각하면 단비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크게 과장된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B 여고 분위기의 근본에는 그 괴상한 강 교장이 있었다. 물론 강 교장 한 사람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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