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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15-1. 남쪽 나라에서


15-1. 남쪽 나라에서      


  선거가 관련된 주요 발표가 예정되어 있어서 보도국 사무실 안은 통화하는 사람들로 오전부터 내내 시끄러웠다. 그리고 오후엔 외국에서 돌발적인 폭발 사고가 나는 바람에 팩스기가 미친 듯이 종이를 쏟아냈다. 사무실 분위기는 갑자기 뜨거워졌다. 동찬도 번역에 즉석 회의에 몇 시간 동안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급한 일을 끝내고 나자 동찬은 사무실의 시끄러운 열기에서 홀연 동떨어져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동찬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고 있었다. 팩스 소리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는 사라지고 귀엔 파도 소리 외엔 사방이 조용해졌다. 창밖의 검은 아스팔트 도로가 출렁이는 검푸른 바다의 물결로 보였다. 동찬은 고독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외딴섬 등대지기가 되어있었다. 그날 바다는 수평선 너머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으로 대낮에도 검푸른 색을 띠었고 파도는 불안하게 요동쳤다.

  오후 늦게 집에서 전화가 왔다. 윤숙이 단비 때문에 학교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단비가 도벽으로 벌을 받던 아이와 함께 밧줄을 타고 사층에서 뛰어내려 교문을 나갔다고 했다. 딸이 학교에서 얌전히 공부하고 있을 줄 알았던 동찬으로서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고, 황당한 사건이었다. 거기다가 윤숙은, 자신은 미국에서 모처럼 귀국한 동생과 쇼핑 약속이 있는 상태라고 했다. 단비의 행방은 동이 찾아보라는 소리였다. 동찬은 윤숙과 전화로라도 입씨름을 할 만한 기력이 없어 전화를 끊었다. 

  단비가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온 이후 단비의 행동은 늘 동찬의 신경을 건드렸었다. 자식이라도 일 년에 서너 번 보는 것과 자신의 허리춤에 두고 보는 것은 달랐다. 단비의 말투, 눈빛, 움직임 속엔 동찬을 찌르는 작은 가시가 감줘져 있었다. 그것은 한때 사춘기적인 반항만은 아니었다. 황주미에게 있었던 예술적 예민함이나 까탈스러움과도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아직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때가 되면 드러낼 단비의 성격이고 운명일 것 같았다. 단비 속에 아직 동찬이 만나지 못한 많은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동찬은 단비가 그런 식으로 학교에서 말썽을 피울 것이라는 예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단비는 자라면서 말썽을 피운 적이 없었다. 일단 학교에 전화를 직접 걸어서 사실 확인부터 해야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그 일을 처음부터 직접 목격한 교사와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전화를 받은 교사는 당직 교사였는데, 단비는 원래 벌 받을 짓을 안 했고 그저 친구가 도망가는데 같이 따라나섰다고 했다. 사층 복도에서 아이들이 밧줄이 아니라 소방 호스를 타고 내려와 도망갔다고 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여럿 있었지만, 항의할 입장은 아니라서 죄송하다고 말을 남겼다. 그러자 그 교사는 엄밀히 말해 방과 후에 일어난 사건이라서 학교는 이 일에 책임이 없다는 말도 잊지 않고 남겼다. 동찬은 단비 친구들 집으로 전화를 돌려서 이미 귀가한 아이들에게 그날 일에 대해 물었다. 아이들은 하나 같이 최근에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했고 그날 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퇴근이 가까워질 무렵 단비와 같이 학교에서 도망쳤다는 민희네 집에서 전화가 왔다. 민희 엄마가 민희한테 전화가 왔고, 무작정 하루 여행을 하고 오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동찬은 그 말을 듣고 전화를 어디서 했는지, 아이들이 어디로 간다고 했냐고 물었지만, 민희 네도 알지 못한다고만 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 동찬의 눈앞에 검푸른 물결이 아른거렸다. ‘그 바다로 갔을까?’     

  동찬은 퇴근 후에 잡혀 있었던 선약을 취소하고 회사를 나섰다. 동찬은 자신의 차도 그대로 놓고는 멍한 얼굴로 여의도를 지나서 어느새 옆 동네인 영등포역 근처의 어느 거리에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거리 이동을 한 것처럼 동찬은 회사 문을 나선 다음 바로 그 장소에 와있었다. 동찬은 자신이 왜 그곳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거리는 노숙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거리의 골목 어귀나 건물 처마 아래에는 술병을 들고 있거나 술병을 등 뒤로 감추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찬을 흘끔흘끔 보다가 곧 퀭한 눈을 내리깔고 땅만 쳐다보았다. 전철 역으로 통하는 큰길엔 행인 몇 사람만 오갈 뿐 한가했고, 경찰도 눈에 안 띄었다. 하지만 저 노숙자들이 큰길에 나서서 돌아다니면 경찰은 어디에서인가 재빠르게 나타났다.그리고 경찰은 누추한 노숙자들이 골목에서 못 나오도록 조치를 취했다. 남의 눈에 띄는 것이 치욕인 사람들은 세상 어디에나 있었다. 동찬은 노숙자들과 반대편의 세상에 살고 있었고, 동찬의 잘 다듬어진 얼굴과 비싼 양복은 그 골목과 너무나 안 어울렸다. 동찬은 단비를 찾기 위해서 그 길에 있지 않았다. 단비 일은 잠시 미뤄두었다. 동찬은 자신의 처참한 기분을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허름한 인간들의 거리를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동찬은 노숙자처럼 땅바닥에 구겨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 그 순간만은 진심 그러고 싶었다. 

  잠시 후 동찬은 건너편의 술집과 모텔이 빽빽이 들어선 유흥가의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은 온갖 종류의 사람이 뒤엉켜 물결처럼 떠다녔다. 호객꾼과 술꾼들 그리고 웨이터와 아가씨들이 보였고, 경찰들은 거리 구석에서 거리 일엔 관심 없는 척 끼리끼리 모여 잡담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동찬은 거리의 사람들 속에서 젊은 연인들처럼 허리를 잡고 가는 중년의 남녀를 발견했다. 여자는 양장점에서 맞춘 듯한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유행에 십 년쯤 뒤처져 보였다. 동찬은 채도가 높은 보라색을 본 순간 머릿속에 불현듯 작은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보라색을 환장하게 좋아했었고, 캔버스에 앞에 앉아 캔버스 안으로 뛰어들 것 같은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었다.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뒷모습의 여자는 황주미였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토록 지워버리고 싶었던 사람. 결혼하기 전, 황주미가 꼭 보여주고 싶다고 졸라서 황주미의 친정이랄 수 있는 여수의 바닷가를 한 번 가보았다. 기차를 함께 타고 갔던 그 시절은 동찬과 황주미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얼마쯤 사람들 틈 속에서 떠다니던 동찬은 단비 생각이 났다. 혹시나 집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집에 아직 안 돌아왔을 것 같았다. 동찬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유흥가 거리를 빠져나와 기차역 간판이 보이는 곳에 섰다. 단비가 기차를 타고 그곳으로 갈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친구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단비가 안전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 했는데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동찬은 공중전화를 찾아서 회삿일로 아는 경찰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정을 말해두었다. 동찬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를 다시 헤매고 다녔다. 어딘 가에서 단비도 답이 없는 물음을 가슴에 안고 헤매고 있을 것 같았다. 그 답이 없는 물음을 먼저 던진 사람은 동찬이었다.      

  출발 시각까지는 거의 세 시간이 남았다. 단비와 민희는 역 주변의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출입문이 투명해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오락실을 발견하고 거기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 가게에서 단비와 민희는 미니 농구 골대에 공을 집어넣는 게임이나, 움직이는 자석을 공 삼아서 골대에 집어넣는 손 하키 같은 게임을 했다. 몸을 움직이는 오락이 그래도 자신들이 길 위에 있다는 불안을 덜어 주었다. 가방을 구석에 던져 놓고, 단비와 민희는 미친 듯이 놀았다. 그러다가 자정이 가까워지자 단비와 민희는 가방을 챙겨 들고 역으로 이동했다.

  단비와 민희는 심야 기차를 기다리며 서울역의 어두운 플랫폼에 섰다.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성인이라기엔 어정쩡해 뵈는 단비와 민희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단비는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고 어둠 속에 서 있었고, 민희는 발로 바닥을 치면서 긴장감을 풀었다. 곧 철로 저쪽의 어둠 속에서 빛이 보였고 단비는 침을 삼키면서 속으로 감격했다. 엄마의 흔적을 찾으러 간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떠난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단비와 민희는 기차에 올라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기차가 출발하자 두 사람은 여행에 대한 기대로 눈빛이 잠시 반짝였다. 그러나 민희는 험난했던 하루의 피곤이 밀려왔는지 눈꺼풀이 내려앉았고 금세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리고 잠들어 버렸다. 그러나 단비는 들뜬 마음을 쉽게 가라앉힐 수가 없어 잠을 못 자고 창밖의 불빛과 어둠을 응시했다. 

  어디쯤 왔을까. 기차는 가로등과 빌딩의 불빛이 비치는 도시를 빠져나와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들판을 지나갔다. 자정을 넘겼으니 다음 날이었다. 분명 '어제'는 단비의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될 것이지만, 어떤 느낌으로 기억될지 기차를 타고 여수를 향해 가는 그 순간에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두려웠던 순간과 희열을 느낀 순간도 있었지만, 아직 전날은 끝이 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단비는 머지않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면 반성과 책임 같은 단어들을 들으면서 야단맞을 것임을 알았다. 이모할머니를 찾아가는 이 여행은 분명 최종적으로 그렇게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끝까지 가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는 그 순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여수에 도착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겪어야만 알 수 있었다. 

  단비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음료와 과자를 파는 카트가 다가왔다. 승객들 대부분이 잠이 든 시각이라서 판매원은 낮은 목소리로 과자와 음료수 이름을 외쳤다. 단비는 음료수를 사려고 지갑을 찾았다. 기차표와는 따로 가방 안에 두었던 지갑. 그런데 아무리 가방과 겉옷을 뒤져도 지갑은 나오지 않았다. 낭패감이 엄습했다. 입이 순식간에 마르고 가슴이 죄어왔다. 단비는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민희야, 일어나봐! 지갑, 지갑이 없어.”

  “뭐?”

  “우리 큰일이야. 나 어디서 지갑 잃어버렸나 봐. 이러면 돌아올 표도 못 사는데…….”     

  음료수 판매원이 카트를 밀고 단비와 민희를 지나가 버렸다. 민희는 부스스한 얼굴로 잠에서 깨서 단비가 배낭을 홀딱 뒤집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숨을 쉬면서 민희가 입을 열었다.     

  "오락실에서 걔네들이었어! 느낌이 이상했어."

  "어?" 

  "농구 골대에 공 던지기 할 때 구석에서 전자오락하던 애들 기억 안 나?"      

  민희 말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았지만 단비는 딱히 그 애들이 불량하거나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누가 소매치기인가는 그 순간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지갑이 단비에게 없다는 것이 기막힌 일이었다. 단비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운다고 해결될 것은 없었다. 답답한 시간이었다. 기차 끝까지 갔던 간식 음료수 카트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단비와 민희 자리를 지나갔다. 그런데 그때 민희가 잠바 주머니에서 묵직해 뵈는 작은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단비가 민희를 다시 보니 태연하고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내가 주스는 사 올 테니 넌 여기 앉아 있어."


  민희는 단비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돌아갈 표도 못 사게 생긴 상황에 대해서 별로 걱정을 안 하는 듯 보였다. 민희는 지나가 버린 음료수 카트 쫓아 옆 칸으로 넘어갔다. 단비는 차분한 민희의 반응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냥 보기만 했다. 잠시 후 이온 음료와 탄산음료를 들고 민희가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단비는 민희 손에 들려 있는 주머니를 주의 깊게 보질 못했다. 민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울지 말고. 표 얼마였지? 이 돈으로 살 수 있을 거야.”

  “무슨 돈?”     

  민희는 자리에 앉은 다음 보란 듯이 그 주머니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턱 걸쳐 놓아두었다. 그때 단비는 보았다. 민희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은 초록색 바탕에 개구리 캐릭터가 그려진 주머니였다. 단비는 충격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단비에게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민희. 너……. 이거……. 반장 것 아냐?”

  “응. 맞아.”

  “소지품 검사했을 때 안 나왔잖아.”

  “다 수가 있지.”     

  잠시였지만 민희의 눈은 어두운 광채가 번뜩였다. 지금까지 단비가 모르던 민희의 모습이었다. 단비는 민희가 무서워졌다. 기차가 기적 소리를 내며 창밖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이 고여 있는 굴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단비의 머릿속은 고장 난 기계처럼 작동이 멈춰있었다. 단비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단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 칸의 출입문을 향해 갔다. 자신이 있던 칸에서 빠져 나온 단비가 자리 잡은 곳은 기차 칸과 칸이 연결되는 부분이었다.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고, 바닥이 울렁거려서 멀미가 날 듯했다. 잠시 그렇게 서 있었는데 드디어 단비에게도 피곤이 몰려왔다. 졸음 때문에 무릎이 꺾였다. 그래도 다시 객차 안으로 돌아가서 민희 옆에 앉고 싶지 않았다. 단비는 배신감에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차갑고 흔들거리는 철판 바닥 위에 주저앉아 졸았다. 단비의 인생에서 그보다 더 신산한 밤은 없었다.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는 여수에 도착했다. 단비와 민희는 함께 기차에서 내렸다. 단비가 앞에 섰고 몇 발짝 뒤떨어져서 민희가 걸었다. 단비는 어수선한 밤을 지내서인지 다리가 무거웠다. 새벽의 상큼한 공기가 코와 폐를 자극했지만, 양치를 안해 숨을 쉴 때마다 불쾌한 냄새가 났다. 얼굴에 물만이라도 묻혀 보겠다고 들어간 공중화장실에선 지린내가 진동했다. 지난밤에 이어 여전히 최악의 상황 속에 있었다. 역 앞은 평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단비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역 앞에서 서성였다. 지난밤 민희의 녹색 개구리 주머니를 본 순간부터 단비의 첫 번째 목표는 민희에게 분노와 경멸을 표출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이모할머니 집을 찾아간다는 애초의 목표는 하찮은 두 번째 목표가 되어버렸다. 단비는 파출소를 찾아갈 생각도 해보았다. 마침 길 건너편으로 파출소도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경찰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서울 집에 전화를 걸겠다고 하면,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연락만 되면 나머지는 동찬이 다 알아서 처리해줄 것 같았다. 그런데 단비는 동찬에게 여수로 오게 된 이유나 이모할머니의 편지 이야기 등등을 자백해야 할 생각을 하니, 동찬에게 전화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여수에 온 목적을 달성한 다음, 서울로 가서 동찬에게 왜 많은 것을 숨겨왔는지 따지고 싶었다. 단비 앞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민희와 상종하지 말고 당장 서울로 돌아갈 것과 하루만 참으면서 이모할머니를 찾는 것.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단비가 빠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있는데, 등 뒤에서 민희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여수 시내를 돌아다닐 버스비는 있어?”


  단비가 돌아서서 민희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민희는 돈도 있겠다, 혼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으나 단비 주위에 머물러 있었다. 단비는 '왠 상관이냐?’라고 호기롭게 받아치고 싶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단비는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민희가 다 안다는 얼굴로 범죄의 증거인 녹색 주머니를 흔들면서 단비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냥 돌아가기는 싫지?"     

  민희가 그렇게 말하자 단비는 더욱 서울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민희는 단비가 지나칠 수 없는 제안까지 했다.     

  "일단 이 돈으로 돌아갈 기차표도 끊고 밥도 먹고 여비로 좀 쓰자. 돌아가서 채워 넣으면 되잖아.”     

  단비는 민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단비는 민희와 역 안으로 들아가서 기차표를 산 후, 근처 식당에 앉아서 국밥도 먹었다. 서먹서먹했지만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혼자서 다니는 것보다 민희와 같이 다니는 것이 더 나았다. 

  단비와 민희는 지역 사람들에게 물어 이모할머니 집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처음에는 창밖으로 차분하고 소박한 도시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버스가 시 외곽으로 나가자 바다와 밭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풍경은 단비 마음속의 혼란스러움을 누그러뜨렸다. 바다와 나무에 마음을 뺏기고 보다가 마침내 목적지인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 마을은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있었고, 멀리서 보면 집들이 텃밭 사이에 점점이 박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을 입구에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뒤엉켜 피어있는 들판이 있어서 이국의 관광지 같은 느낌도 주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집을 찾기는 의외로 쉬웠다. 마을 중간에 마당 딸린 단층 양옥이었다. 단비는 아직 이모할머니가 그 집에서 사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집 초인종을 누르고 문에 노크할 땐 가슴이 떨렸다. 그런데 집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실망하고 돌아서려는데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마을 길에서 다가왔다. 여자는 넓은 이마에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눈초리엔 수심이 옅게 배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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