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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Sep 12. 2024

이화동, 깊은 언덕 집 (창작소설)

15-2. 남쪽 나라에서

15-2. 남쪽 나라에서


  “누구신데 초인종을 누르세요?”

  “저희는 서울에서 이분을 찾아왔습니다. 이분 댁 맞나요?”     

  단비는 이름이 적힌 쪽지를 그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지나갔다. 곧 그 여자는 차분함을 되찾았고 대답을 듣는 순간 단비는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네, 맞아요. 서울에 남아있다는 주미의.....”

  “네네. 저 오단비에요. 황주미 씨 딸이에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소파와 장식장 외엔 물건이 없는 깨끗한 거실이었다. 하지만 커텐이 쳐져 있어서 응달 진 거실은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찬찬히 보니 방문마다 작은 염주가 걸려 있었다. 염주는 그 집안이 얼마나 번뇌 속에 버텨왔는지 말없이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여자가 부엌에서 주스 두 잔을 갖고 나와 단비와 민희 앞에 놓았고 본인도 단비와 민희 앞에 앉았다. 단비는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몰라 여자의 눈치만 살폈다. 여자도 시원스럽게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여자가 장식장의 액자에 놓여 있는 작은 사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단비는 그 여자가 사진을 가리키기 전까지 벽에 그런 사진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학생이 찾는 분은 저 분이에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제대로 찾아오긴 왔지만 늦게 온 셈이었다.      

  “이모 할머니 맞죠?”

  “집에 복잡한 사정이 있었어요.” 


  여자는 단비가 묻는 말엔 직접 대답을 안 하고 다른 말을 했다. 단비는 간신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면서 물었다.      

  “이모할머니를 직접 뵙고 싶어 왔는데.... 황주미 씨, 엄마가 미국에서 화가로 사는 것은 아시죠?"     

  단비는 막상 황주미를 엄마라고 부르려니 어색해서 혀가 꼬이는 것 같았다.      

  "엄마와 연락하세요? 주소나 전화번호 알고 싶어서요."

  "우리도 연락은 안 해요. 여기까지에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저기 혹시 저희 엄마와 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내가 누구냐고요?“

  ”네.“

  ”황주미씨와는 사촌사이에요 저 분은 우리 어머니이고요.“      

  사촌 사이이지만 여자는 황주미를 ‘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단비 입장에서 보자면 앞에 있는 여자는 오촌 이모인 셈이었으나 단비는 선뜻 앞에 있는 여자를 살갑게 대할 순 없었다. 여자와 단비 사이엔 특별히 나쁜 감정은 없었으나 냉랭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럼 저희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는 왜 안 계시는 거에요?“

  ”황주미씨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들었어요.“      

  여자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엄마의 미국 연락처는 결국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단비는 허무감에 온몸의 기운이 쫙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무리를 해서 왔는데 이게 끝이라니. 단비는 풀이 죽어 자리에 앉아 있었고 민희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잠시 후에 작은 방으로 들어갔던 여자가 카드 봉투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     

  "옛날 사진 중에 남아있는 것이에요. 여기에 우리 집 전화번호 적어놨으니까 나중에 다시 연락해도 되요."     

  여자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더는 말 할 게 없다는 의미를 확실히 단비에게 전달했다. 카드 봉투를 받은 단비는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황주미가 어린 시절에 어딘가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이 들어있었다. 상상 속의 얼굴과는 분명 달랐지만, 신기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처음 보는 엄마의 얼굴이었지만 단비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단비는 엄마의 현재를 알고 싶었던 것이지 과거를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단비는 봉투 안의 사진을 대충 확인하고 덮었다. 단비와 민희는 고맙다는 인사를 깍듯이 하고 그 집에서 나섰다.      

  단비와 민희는 작은 밭과 공터가 있는 동네 길을 지나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 엄마의 친척들이 고향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당사자를 직접 만나지 않았으니 단비가 확인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당사자를 만날 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단비는 공터에 무수히 피어있는 가을꽃들을 지나쳐갔다. 그런데 단비는 이상한 시선이 자신의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기분을 느꼈다. 뒤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연히 단비는 이상한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수척하게 마른 얼굴 때문에 환자처럼 보였고, 그 여자가 걸치고 있는 긴 원피스는 연극 무대 의상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풀과 꽃들이 무성한 들판에 멍하니 서서 단비와 민희를 신기하다는 듯 보았다. 단비의 눈엔 그 여자야말로 그 마을과 어울리지 않은 이방인으로 보였지만, 그 여자는 단비와 민희를 이방인 보듯 보았다. 기괴한 행색이었다. 단비는 이상한 기운을 뿜어내는 여자의 멍한 눈초리가 무서웠다. 민희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먼저 슬슬 뒷걸음을 치면서 뛸 준비를 했다. 단비 역시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뛰자!"     

  단비는 민희의 말에 따라 아무 이유 없이 달음질을 쳤다. 단비는 뛰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허둥지둥 조용한 마을을 빠져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여행은 성과를 거두기는커녕 그렇게 허망하고 괴상하게 끝났다. 큰길 버스 정류장에서 오래 기다리지 않아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가 왔다. 단비와 민희가 탄 버스는 바닷가를 따라 난 도로를 달렸다. 도로 아래로는 가파른 절벽이 있는 곳도 있었고, 완만한 경사면에 층층이 밭을 일구어 놓은 곳도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절벽과 푸른 밭들, 파란색과 녹색을 오가는 바다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황주미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 바닷가를 보고 자랐다면 그 풍경을 마음속에 영원히 담아두고 싶어 할 것 같았다. 창밖을 보면서 단비는 어렸을 적에 봤던 황주미의 바닷가 그림을 생각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우수가 깔려있는 바닷가 풍경. 화가, 황주미는 지금도 이 바닷가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단비는 황주미가 지구 어딘가에서 분명 또 다른 바다를 그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그 바다를 그린 그림 옆에서 놀고 있던 아이에 대한 기억을 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황주미는 여기서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단비는 바닷가 길을 걷고 싶어졌다. 

  단비는 버스 차장에게 손을 흔들면서 내린다는 표시를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민희와 단비는 해안 도로를 따라 걸었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바닷바람은 시원했다. 단비는 수평선 너머 먼 하늘을 보면서 가슴에 쌓였던 울분을 날려 보내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인정하고 나니 여행의 의미가 오히려 그렇게 허무하지 않았다. 안개와 아지랑이가 걷히고 수평선은 수평선으로, 하늘은 하늘로 보일 뿐이었다. 단비는 아침부터 아무 소리 않고 자신을 따라온 민희를 보았다. 종일 무뚝뚝한 얼굴로 있던 민희도 바다가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느새 단비와 민희는 함께 수평선 너머를 응시했다. 단비는 민희에게 말을 걸었다.     

  “만약에 말이야, 엄마한테 새로운 가정이 생겼는데 내가 미국으로 찾아가면 엄마가 정말 좋아할까? 나 부담 주기는 싫거든.”

  “조용히 찾아간다면 좋아하지 않을까? 새 식구들 모르게.”

  "작업실이나 화랑으로 찾아가면 분명 만나 줄 거야."

  "근데 아까 그 여자가 미국 주소 모른다고 했잖아."

  "아직 희망이 있어. 미국에 가서 전시회를 열었던 화랑을 찾아갈 거야. 거기엔 분명 연락처가 있을 거고."     

  민희에 대한 화가 누그러진 단비는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민희야, 나 한 가지 이해 안 되는 게 있어.” 

  “뭐?” 

  “초록색 주머니, 반장 돈주머니 말이야. 그걸 왜 나한테 보여줬어? 그 주머니 갖고 다니는 거, 꼭 ‘나 나쁜 짓 했어요’라고 말하는 거잖아. 돈만 빼고 그 주머니 버릴 기회는 많았어. 내 말이 틀려?”     

  민희가 지난밤 기차에서 어두운 광채로 번뜩이던 눈빛으로 단비를 아주 잠시 쏘아봤다. 순간 단비는 이유 없이 겁이 나서 다시 가슴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곧 단비는 평정을 찾았다. 민희가 겁나지 않았다. 민희가 대답했다.      

  “후후. 들켰어. 아니 들키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단비는 민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비의 마음속에 혼란이 일었다. 민희가 계속 말을 했다.      

  "그 사람을 시험하고 싶었거든.” 

  “누구를?”     

  단비의 머릿속엔 지난밤이 아니라 이 학년이 되면서 일어났던 여러 의문스러운 일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떤 일은 민희와 직접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고, 연관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단비는 그 일들이 모두 민희와 직접 연관이 있다고 믿었다.      

  “강기중. 도둑으로 몰리면 그 사람은 내 편을 들어 줄까. 아니면 나를 벌 주지 못해 안달을 할까, 시험해 보고 싶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민희의 눈빛은 위급한 환자의 심장박동 그래프처럼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목소리만은 담담하게 유지하면서 말할 줄 알았다.     

  ”우리 집에 아버지가 없잖아.“

  ”근데?“

  "그 사람은 강 씨고, 나는 최 씨니깐 다들 몰라."

  "나도 모르겠어." 

  "우리 엄마가 최 씨야. 호적 엄마 쪽으로 되어 있어."     

  단비는 이렇게 평화로운 바닷가에서 민희의 쓰라린 고백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밝은 햇빛이 원망스러웠다. 단비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목구멍에 걸려 있는 가시를 꺼내듯 단비가 말을 했다.      

  "그 사람 너를 처음부터 알았을 거 아냐?”

  "나중에 이름 보고 알았겠지. 처음엔 내 얼굴도 몰랐을 거야."

  "어제 사층 상담실에 가둔 것도 그 사람?"

  “처음에는 학주가 끌고 교무실 구석에 꿇어 앉혀놨는데, 그 인간이 나를 보는 것이 짜증 났는지 사층 상담실로 데려가더라. 하긴 내 얼굴 보면 기분 좋을 수가 없겠지. 난 그냥 엿 먹이고 싶었을 뿐이었고.”     

  먼지와 땀이 배어있는 민희의 볼 위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작은 눈물방울은 단비의 민희에 대한 의구심을 모두 쓸어버렸다. 단비와 민희는 말없이 지방국도를 따라 이십 분 정도 걷다가 버스를 잡아타고 여수 시내로 돌아왔다. 


  늦은 오후의 열기로 데워진 레일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단비와 민희는 겨우 반나절 정도 야외에 있었는데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 이제는 기차를 잡아타고 돌아갈 일만 남았다. 이번에도 민희가 먼저 집에 전화해서 두 사람이 무사히 서울로 돌아간다는 말을 전했다. 단비는 몸과 마음이 한층 가벼워져서 집과 학교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겁이 나지 않았다. 돌아가면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지만, 단비는 차분히 책임져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여전히 단비는 집에 전화하지 않았다.

  어느덧 기차가 출발할 시간이 다가왔다. 단비와 민희는 마지막으로 역을 둘러보면서 기차에 올랐다. 이십사 시간도 머물지 못하고 떠나자니 아쉬웠다. 여전히 파란색과 녹색이 섞인 바다가 단비의 눈에 아른거렸다. 이 여행이 끝이 아니라 학교 졸업하면 미국에 꼭 가리라고 마음먹었다. 기차 안에서 단비와 민희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도시를 빠져나오자 기차는 북쪽을 향해 무심하게 질주했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모습과 벌판에 어둠이 내려오는 모습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던 민희가 건조한 목소리로 먼저 말했다. 


  "니가 언젠가 얘기 해줬던 동화 생각난다. 펭귄 주제에 추위를 싫어한 펭귄 있잖아."

  "그래서 빙하 타고 적도로 내려왔었지." 

  "남극에서 올라 간 거 아냐?“

  ”그렇게 되나? 헷갈리네.“

  “행복한 결말이었나?"

  "응. 적도에 사는 희귀 펭귄 친구도 만나고, 소원대로 야자 주스 마시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어. 근데 넌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어.“

  ”내가?“

  ”응.“

  "나도 그 동화가 좋았어. 펭귄이 웃겨서 재미있었어."     

  두 사람은 이야기했고, 민희의 목소리가 단비의 귀에 자장가로 들렸다. 단비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단비가 단잠에서 깨어났을 때, 완전히 어두운 밤이었고 기차는 서울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단비와 민희는 피곤한 얼굴로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비와 민희가 말없이 사람들 틈에 섞여 역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출구 근처에는 초조하게 딸을 기다리고 있던 민희 엄마가 보였다. 단비는 민희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민희는 단비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다음 엄마 쪽으로 달려갔고, 두 사람은 함께 택시 정류장 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단비는 역 출구 앞 광장에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여수에서는 당당히 동찬의 아파트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때 단비에게 생각 난 곳은 김 여사 집이었다. 김 여사라면 뭐라 말 안 하고 단비를 맞아 줄 것 같았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을 찾아서 두리번거리는데, 길 저쪽에서 단비를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동찬이었다.      

  "여수에 갔다 왔다고?"

  "네."


  동찬도 단비도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지 몰라서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아빠 집 말고 할머니 집으로 가면 안 되요? 거기서 며칠만 지낼게요."

  "일단 차로 가자."


  동찬의 차는 근처 빌딩 지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단비와 동찬은 자동차 운전석과 보조석에 나란히 앉았다. 나가고 들어오는 차량이 없어서 지하 주차장 안은 공동묘지처럼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동찬은 재빨리 시동을 걸지 못하고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앞만 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시작한 쪽은 단비였다.     

  "아빠, 여수 엄마 쪽 친척들과 따로 연락하세요?"

  "아주 가끔 한다."

  "왜 그런 말씀은 안 해 주셨어요?"

  "필요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아빠의 일방적 판단이잖아요. 나도 관계된 사람이고요.”

  “가보니 거기선 뭐라고 하든?"

  "미국에 있는 엄마랑 연락 안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연락처는 모른대요. 그리고거기 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들었고요."

  "....."

  "엄마 어렸을 때 사진 받아왔어요. 엄마 어땠어요?"

  "사진으로 보면 되잖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냐고요?"     

  두 사람의 대화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동찬은 조용한 대화를 견딜 수 없었는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동찬은 황주미에 관해서라면 시원하게 밝히지 않고 늘 도망쳐왔고 그 순간에도 그랬다.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떠안고 있는 것 같은 단비는 동찬이 원망스러웠다. 동찬과 단비를 실은 승용차는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나와 지상으로 올라왔다. 단비는 여수에서 받았던 사진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가방 안에 있던 카드 봉투를 다시 꺼내 보았다. 찬찬히 뒤져 보니 십 대 후반의 황주미 사진 세 장이 봉투에서 나왔는데, 여전히 낯설었다. 단비는 자신이 엄마와는 닮은 구석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낯설면서도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비는 사진을 가방 속에 다시 넣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동차는 도심 밤거리를 유유히 가고 있었다. 방향을 보니 동찬의 집이 아니라 김 여사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창밖 어둠 속에서 어떤 얼굴이 불쑥 솟아나서 단비를 향해 혓바닥을 내밀고 조롱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간 다시 그 얼굴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다가 사라졌다. 여수 이모할머니 집에서 나오면서 봤던 연극배우 옷차림의 중년 여자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이상한 여자를 맞닥뜨린 순간은 눈빛이 이상해서 도망치기 바빴지만 지금 생각하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로 사진 속의 얼굴이었다. 단비는 황주미를 보고 온 것이었다. 단비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단비의 눈에 자동차 창밖의 네온사인 불빛이 혼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동찬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앞만 보면서 운전했다. 몇 분 동안 단비는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을 꾹 누른 채 있어야 했다. 자동차는 김 여사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 아래에 도착해 있었다. 동찬이 차를 세우자, 단비가 간신히 한마디 했다. 


  "아빠, 그 사람이 황주미였나요?“     

  단비의 앞도 뒤도 없는 질문에 동찬은 당황하지 않았다.      

  ”만나 봤니?“

  ”모르겠어요. 그 집에서 나오는 길에 이상한 여자를 봤어요. 혼자 동네에서 왔다갔다하는 여자요. 어떻게 된 거에요? 그분이 엄마인가요?“

  ”니가 누굴 보고 그러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구나.“

  ”하여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미국에 있어야 하잖아요.“

  ”애초에 황주미는 미국에 가지 않았다.“

  ”네?“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병원을 들락였다.“     

  단비는 다시 봉투 속의 사진을 꺼내봤다. 분명히 길가 꽃밭에서 봤던 여자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동찬도 그 사진을 입술을 깨문 채 보았다. 그러다가 단비가 갑자기 생각난 듯 동찬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아세요?"

  "모르신다." 

  "아, 그랬구나."     

  동찬의 눈은 단비가 차에서 내릴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단비가 차에서 내려서서 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찬에게 물었다.      

  “근데 할머니는 엄마가 미국에서 화가로 성공한 줄 아시잖아요. 미국 남자랑 재혼도 하고. 왜 할머니한테 말 안 하셨던 거예요?"     

  동찬은 짧은 한숨을 쉬고는 유리창 너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질문이라기보다는 단비의 낮은 비명일지도 몰랐다. 동찬은 한숨으로만 대답했고, 단비는 동찬의 침묵이 길어지자 자동차 문을 닫았다. 

  김 여사는 한밤중에 단비가 나타나자 놀란 얼굴로 단비를 맞았다. 김 여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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