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에필로그
17. 에필로그
가을날, 단비는 황주미의 유골함을 들고 여수의 인적이 드문 바닷가 앞에 서 있었다. 십 이년 전, 민희와 함께 여수를 와본 후 다시 여수를 찾아온 일이 없었다. 여수에 올 일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단비가 처음 여수를 찾아온 후 얼마 안 있어서 황주미는 광주의 요양소로 옮겨졌다. 단비는 신년 명절마다 연례행사로 광주에 혼자 내려와서 황주미를 만났었다. 오동찬이나 황주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비,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황주미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단비는 혼자서 화장터에 따라가서 유골을 받아들었다. 동찬은 황주미가 있었던 요양원에도 안 왔었고,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 해안을 어루만지는 파도에 휩쓸려 뼛가루는 바다로 사라져갔다. 그렇게 사라져간 황주미를 단비는 담담히 바라봤다.
단비는 늦은 오후에 여수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기차 안엔 빈 좌석이 많이 있었다. 기차는 시내를 벗어나서 황혼과 어둠이 뒤섞인 벌판을 달려갔다. 신기하게도 민희와 함께 기차를 타고 여수에서 돌아가던 날 보던 들판과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어린 마음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단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비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황주미에 대한 기억도, 현재의 복잡한 일상에 대한 생각도 잊고 싶었다. 그러나 단비가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손가락이 꿈틀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단비는 의자에서 잠이 안 와서 전전긍긍하는 사람처럼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눈을 떳다. 단비는 가방 안에서 백지 노트와 펜을 꺼내 들고는 한동안 백지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창틀인지 보도블록 사이인지 알 수 없었다. 한 줌의 흙에 뿌리를 둔 덩굴이 힘겹게 시멘트벽을 타고 올라갔다. 메마르고 비틀어진 덩굴은 가시 돋친 철조망의 철사처럼 보였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기 위해 지내왔던 지난 세월이 기억 속에 스쳐 지나갔다.
단비는 우습게도 미술대학에 진학한 다음 그림에 대해 흥미를 잃어갔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곳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미술과 상관없는 일을 했다. 아무도 단비에게 간섭을 안 했는데, 십여 년 동안 단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과 싸우는 사람처럼 혼자 그림을 피해왔다. 단비의 눈에 한 가닥 눈물이 흘러내렸다.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단비였는데 종이를 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감동해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이 불쌍하다는 생각 때문에도 아니었다. 하얀 백지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니, 비로서 불운했던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가슴에 사무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흥분했던 마음이 진정되자 단비는 민희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는 곳이 멀어서 그런지 단비는 민희를 자주 만나지 못했다. 한두 번 만났던가. 민희는 몇 년 전에 돈을 벌겠다며 가족과 함께 따듯한 해외 어딘가로 이주했다. 단비는 민희와 나눴던 많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민희는 지금쯤 남쪽 나라의 해변에서 해먹에 편안히 누워 열대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을 것 같았다. ‘아, 부러워.’ 민희의 모습을 눈앞에 본 사람처럼 단비는 허공에 속삭였다.
단비는 집으로 돌아가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따듯하고 나른한 분위기가 감도는 노란색과 주황색을 화폭에 마구 뿌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지 구체적인 대상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펜을 쥔 손을 종이 위에 올려놓아도 보았고,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그래도 떠오르는 대상은 없었다. 그런데 한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데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단비는 놀랐다. 허공 속에 스쳐지나가는 얼굴이 있었다. 그것은 할머니, 김 여사였다. 그리고 차례로 단비의 눈앞에 태롭게 산에 매달려있던 작은 집과 그 집을 억누르던 꽃나무 덩굴, 마루에 단정히 앉아 재봉틀을 돌리던 김 여사의 모습이 보였다. 단비의 귓가엔 기차 소리 대신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도 들렸다. ‘그 낮은 재봉틀 소리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 소리를 그릴 수 있을까.’ 단비는 자신에게 물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