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보는 이 없이 능소화는 지고
16. 보는 이 없이 능소화는 지고
다음날, 민희의 자리는 종일 비어 있었다. 단비는 수업은 받았지만, 방과 후에 사 층 상담실 책상에 앉아서 반성문을 썼다. 그다음 날도 수업 듣고 방과 후 두 시간 동안 반성문을 썼다. 그렇게 일주일간 '근신' 처벌을 받아야 했다. 민희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떠돌았지만, 단비는 아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여수에 다녀온 후, 단비는 김 여사 집에서 학교다녔다. 귀가하는 길에 단비는 일부러 민희네 가게 쪽으로 둘러서 가보았는데 가게 문이 닫혀 있었고 연락도 안 되었다. 단비는 답답했다. 단비가 여수에서 돌아오고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단비가 방과 후에 민희네 가게 앞을 지나 걸어갔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가게 간판을 뜯어내는 것이 보였다. 단비의 마음 한편이 '쿵' 내려앉았다. 단비가 고개를 쳐들고 간판이 철거되는 광경을 보고 있는데 가게 안에 있던 민희가 불쑥 단비 앞에 나타났다.
”단비야.“
"어떻게 지냈어?"
“나 전학 가.”
“..... 그럼 그 사람은?”
“그냥 있겠지.”
“니가 왜 가야 하는데? 이건 거꾸로잖아?”
“그 사람이 움직이기에는 번거롭잖아.”
단비는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민희는 그런 단비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싱긋 웃으며 보았다.
“엄마가 알고 결정한 거야. 다 끝났어."
"어디로 가는데?"
"차 타고 두 시간은 가야 해."
"그렇게 멀리?"
"응. 버스로 한 번만 갈아타면 된데. 가게도 집도 운 좋게 빨리 결정된 거 같아. 이사하면 전화 걸게."
길바닥에서 민희와 단비는 마치 내일 학교에서 다시 만날 친구처럼 덤덤하게 아쉬워하지 않으면서 헤어졌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햇빛이 좋은 늦가을이었다. 단비는 학교를 마치고 응달진 골목층계를 올라갔다. 동네 사람이 모두 이사라도 간 듯 골목은 인적이 없고 고요했다. 김 여사 집 앞에 도착하자 단비는 공기 중에 감도는 꽃향기를 맡을 수가 있었다. 눈을 감으니 매혹적인 꽃향기는 더욱 짙어졌다. 능소화 향기일까? 눈을 뜨고 보니 지붕엔 억세게 자란 넝쿨만이 무성했고 능소화는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빼고 지붕의 눈에 잘 안 띄는 쪽을 보니 능소화 몇 송이가 아직도 있었다. 방금 단비의 코끝을 간지럽힌 향기가 응달에 핀 능소화의 향기였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그 향기는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단비는 웬일인지 살짝 열려 있는 대문을 밀어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 시각쯤이면 김 여사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마루에 단정히 앉아 하염없이 서쪽 하늘을 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마루에는 아무도 없었고 댓돌엔 김 여사의 신발이 있었다. 김 여사가 없는 마루는 어두워 보였다. 단비는 김 여사를 불러 보았다.
“할머니! 할머니!”
안방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비가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얇은 이불만 덮은 채 옆으로 누워있는 김 여사가 눈에 띄었다. 단비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김 여사는 그런 식으로 가끔 낮잠을 자곤 했었다. 그래서 안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 쪽으로 가려는데 거실 구석에 놓여 있는 과일이 보였다. 과일은 먹기 좋게 이미 깎여진 상태로 접시 위에 있었다. 단비는 배가 고파서 일단 가방을 던져 놓고 과일을 베어 먹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이 덥고 가물어서 그런지 과일은 유난히 맛이 좋았다. ‘으적으적’ 고요한 마루에 단비가 과일을 베어 먹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비는 먹는데 열중한 나머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과일을 다 먹었나니 다시 마루는 조용해졌다. 그런데 적막함이 이상한 기분을 몰고 왔다. 무서운 기분이 든 단비는 얼른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김 여사는 조금도 바뀌지 않은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단비가 다가가서 김 여사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어 깨울 때, 어깨만 흔들린 것이 아니라 바짝 마른 땔감처럼 굳은 상체 전체가 뻣뻣하게 흔들렸다. 단비는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단비는 김 여사의 일그러진 채 굳어진 얼굴을 보고 말았다. 김 여사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표정이었다. 단비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호흡을 진정시킨 다음에 조용히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다. 김점순 여사다운 작별이었다. 단비로부터 김 여사 소식을 듣고 처음 달려온 이는 당숙이었다. 이어서 다른 오 씨 문중의 사람들이 도착했다. 하필 동찬은 일본 출장 중이어서 다음날 급히 귀국했다. 유윤숙은 김 여사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동네에 김 여사 소식이 퍼졌다. 골목 아래 구멍가게 앞에 모여 있던 사람 중 나이든 이가 한마디 했다.
"나도 그렇게 가야 할 텐데. 무슨 공덕을 쌓았길래 자다가 그렇게 갔나."
"누가 아니래요. 호상이야.“
"그렇긴 하쥬. 그래도 그 양반 불쌍했시유.“
십 년이 넘도록 김 여사가 부탁한 물건을 갖다 주었던 구멍가게 여자는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구멍가게 여자가 김 여사가 살아온 세월을 알았을까?
장례식이 끝난 후에, 단비는 김 여사의 집에 혼자 남았다. 김 여사가 떠나자, 그 집은 허물어져 갔다. 담장 구석이 이유 없이 무너졌고, 밤이면 집안과 집 밖에서 쥐가 나와 단비와 눈싸움을 했다. 단비는 다시 동찬의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동찬의 아파트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 속의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동찬의 아파트 말고 단비가 살 곳은 없었다. 단비는 짐 정리를 하고 김 여사의 집에서 다시 나왔다. 대문을 닫고 좁은 골목을 내려왔다. 그리고 그 동네에 돌아올 일이 없었다.
삼학년 이 학기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단비는 운동장에서 영경이와 우연히 마주쳤고, 영경이한테서 말로만 떠돌던 재개발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산 전체를 짓누르던 시영아파트와 골목집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사 나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김 여사 집이 있던 골목의 집들도 철거예정지로 제정되어 주민들은 모두 이사 갔다고 했다. 다만 영경이네 집은 산 아래쪽이어서 철거예정지에 묶이지 않아서 그대로 산다고 했다.
"집들 밀어버리고 뭐가 들어선데? 아파트가 들어서기엔 너무 경사가 심할 거 같은데, 그냥 집들이겠지?"
"아냐. 아무것도 안 들어선데."
"그럼 왜 동네는 부스는 건데?"
"나무를 심는데. 산꼭대기에 성곽이 있던 옛날처럼 복원한데."
"뭔 소리지?"
"사실은 나도 모르겠어."
단비와 영경이는 '복원'이라는 말을 듣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그 땅을 다시 집이 없던 시절로 되돌리는 사업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모두가 아파트 짓기에만 골몰하는데 왜 그 동네만 그런 열풍을 피해갔는지 단비와 영경이는 궁금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어쨌든 골목과 집들이 없어진다는 영경이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김 여사 집을 휘감고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갔던 능소화 넝쿨이었다. 그 조용한 골목과 능소화 넝쿨이 모두 과거로 사라진다니 아쉬울 뿐이었다. 그렇게 김 여사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사라져갔다.
얼마 후, 단비는 동찬과 단둘이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은 일이 있었다. 말없이 밥을 먹고 있는데 동찬이 단비에게 물어왔다.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보았니?"
동찬이 김 여사가 임종한 다음 날, 오전에 도착했을 때 의사와 집안 어른이 김 여사를 일 차로 수습했었다. 동찬은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돌아가신 순간을 못 지킨 것이 가슴 속에 한 맺혔다.
"마지막을 봤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이미..... 하지만 할머니는 홑이불은 덮은 채 이렇게 모로 누워 계셨었어요. 평소 낮잠 주무시던 딱 그 모습이었고, 이불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었어요. 주무시다가 숨을 거두신 거예요. 더는 평온하게 가실 수 없었을 거예요."
단비의 말을 듣고 있던 동찬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아빠, 능소화 기억나세요? 할머니 집, 지붕까지 자라서 꽃이 폈었잖아요?"
"응."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가을이어서 꽃이 거의 다 졌는데 꽃향기가 우리 집 앞이랑 마당에 가득했어요.”
동찬은 그 능소화는 단비의 엄마, 황주미가 그 집에서 나오기 전에 심은 것이라는 말은 단비에게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