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친정엄마가 지워준 나의 별명은 할아버지다.
단발머리 중학생이 되자 난 세상을 많이 산 할아버지처럼 삶이 주는 아픔과 기쁨에 유별나게 슬퍼하지도, 유별 나게 기뻐하지도 않았다. 이 또한 다 지나가는 것이기에, 당당하게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쯤 나는 독서에 빠지고, 사색에 빠졌다.
머슴아 같았고, 새처럼 종알거리던 나는 중학생이 되자 몸과 입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남의 이야기를 자주 들어주다 보니 저마다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처럼 삶도 다양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세상엔 이유 없는 삶이 없기에, 이해 못할 것 또한 없다. 그래서인지 싸움을 한 적이 별로 없다. 대부분 대화로 풀거나, 혼자 며칠 속앓이 하다 보면 해결됐다. 누군가와 다툼으로 감정 소비하는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불편해했던 것 같다. 그 버릇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사실여부를 구차하게 설명하기보다. "네 생각은 그렇구나"라고 생각했으며, 다름에서 오는 관계의 서먹함을, 사실이 아니어도 억울함을 따지지 않았다. 다르면 다른 대로 대처하고, 침묵했으며 때론 방관하면서 타인을 이해하려 했다. 그렇다고 타협하거나 이해시키려 한 적도 없다. 이런 나에게도 같은 행위가 3번이 되면 그 상대가 누가 되었든 내 삶 속에 못 들어오게 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니 그 상대를 버렸다는 표현이 맞다. 타인에게 마음의 상처를 계속 받는 건 미련한 짓이고, 그런 사람에게 나의 귀한 시간과 마음을 소비하는 건 가치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별명인 할아버지처럼 이젠 나도 할머니가 되어가는 길목에 와있다. 지금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도움이 될 거라는 주책? 이 아직 있다. 그런 주책 또한 버려야 될 것이다. 내 삶에서 버려진 사람들은 구차한 삶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남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거나, 사실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포장해 억지를 부린다. 그 억지를 제삼자들이 믿는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어쩌면 자신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모를 수도 있다. 어쩜 알면서도 음흉하게 자기의 이익만 보면 된다 생각하는 치졸한 사람이다. 이 얼마나 불쌍한가.
들어준다는 표현조차 나의 오만일지도 모르기에 이것 또한 조금씩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이가 먹어도 설 익은 감정들이 불쑥불쑥 나올 때가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렵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건 더 어렵다. 이 어려움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비우고, 내려놓는 연습을 이 여름에 더 해야겠다. 마음치료를 해준다는 그림이 그려진 나무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나무는 그때 "그냥 버티는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이제 가면 그 나무는 나에게 뭐라고 말해줄까? "잘 버렸어"라고 말해줄 것 같다. 아니 그런 말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