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7년. 그녀의 부재는 그 어떤 상실감보다 깊었다. 그동안 엄마에 대한 글을 쓰거나, 지인에게 엄마와의 추억을 나누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엄마라는 단어만으로도 소낙비 같은 눈물은 모든 걸 방해했기 때문이다. 슬픔의 굳은살이 조금씩 물렁해진 요즈음 이별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관대해졌다. 엄마의 죽음을 연락받고 한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며칠이 지난 상태였다. 나를 위해 관 뚜껑을 완전히 봉하지 않았기에, 엄마를 부둥켜안을 수 있었다. 얼려진 엄마의 몸 위로 떨어지는 나의 뜨거운 눈물로는 그녀를 깨울 순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귀에 "엄마 사랑해요"라고 수없이 소리쳐도 그녀는 꿈쩍도 안 했다. 엄마는 나의 목소리를 들으셨을까?
최근 약 부작용으로 심한 근육통을 2년 정도 앓았다.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자 덜컥 겁이 났다. 죽을힘을 다한 수중운동은 풀렸던 몸과 마음에 단단한 근육을 만들어줬다. 내가 조금이라도 젊고 건강할 때 숙제 같았던 엄마 이야기를, 언니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산소에 가서 부모님이 좋아하는 소주를 납골당 벽에 뿌렸다. 합장된 납골당 벽엔 부모의 속을 제일 많이 썩인, 하나 남은 아들의 손길이 없었던지, 그 흔한 꽃 하나 걸려있지 않았다. 엄마가 살아생전 나와 같이 이곳에 올 때면,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그리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묻힌 산소를 가곤 했다. 엄마는 아빠의 납골당 보다 더 큰 소리로 엄마, 아빠를 부르며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나는 통곡하는 굽은 등의 엄마에게 혼잣말로 죄송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했다. "엄마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어 자식의 마음을 모른다"라고 씩씩거리며 대들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모진 나의 말로 엄마는 얼마나 서럽고,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외할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어을까. 80이 넘어도 그곳에 갈 때면 어린아이처럼 엄마! 엄마! 하던 그 모습은, 먼 훈 날 나의 모습일 것이다.
나의 엄마 김상매, 그녀는 어릴 때 부모님 모두를 잃었다. 세명이나 되는 언니들보다 하나뿐인 오빠를 더 따랐고 그 밑에서 성장했다. 외삼촌이 결혼 한 첫 날밤, 엄마는 신혼부부의 방에 들어가 그 가운데서 자겠다고 울 정도로 어렸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엄마에 대한 외숙모의 사랑은 엄마의 언니들보다 더 깊었다. 그 덕에 엄마는 아름다운 성인이 되었고, 경찰이었던 아버지와 그 당시 흔치 않은 연애 끝에 결혼하여 오 남매를 뒀다. 엄마는 멋진 남편을 둔 행복한 아내로, 올망졸망한 이쁜 자녀들 둔 엄마로서 행복해했다. 엄마 불행은 경찰직을 퇴진하고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 아빠와 공부머리가 없는 아들들의 사업자금으로 점점 더 깊어져갔다.
아들, 특히 장남에게 쏟은 정성과 금전에 비해 큰 오빠는 자기 자신만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둘째 오빠는 알아서 자립하려 애썼지만 하는 일마다 결과가 좋지 못해, 경제적인 부담을 주는 삶을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줬다. 장녀인 언니는 옛 어른들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우리 집 최고의 희생양이 되었다. 언니나 오빠들에 비해 잦은 병치레인 나와 막내인 남동생은 가족 구성원들의 눈치를 보며 막내라는 보호대로 언니만큼 자율적인, 또는 타율적인 의무감은 덜했다. 대신 경제적으로 부모님을 힘들게 하는 두 오빠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그들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부모님은 언니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 했다. 엄마의 병시중으로 학교를 못 가는 게 다반사였고 오빠들과 동생들까지 챙기는라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언니가 결혼해 친정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녀가 떠난 자리는 컸다. 그래서일까 부모님은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철없이 돈걱정만 시키는 두 오빠들보다 번듯한 집에 시집간 언니에게, 또는 아들보다 살가운 사위에게 많은 것을 상의했다.
맘 좋은 형부는 언니대신, 또는 언니와 같이 부모님의 병치레나 집안 행사에 필요한 모든 행사를 아들대신 하게 되었다. 아니할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나았을 것이다. 초기 치매환자가 된 엄마는 소변실수뿐 아니라 정신적인 사고로 식구들 특히 언니를 힘들게 했다. 아들이 보고 싶어 간 작은오빠집에서, 소변실수했다는 이유로 엄마가 살아생전 가고 싶지 않다던 양로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일 년쯤 지난 추석을 며칠 앞두고 돌아가셨다. 내가 도착한 그때, 엄마는 관속에서 차갑게 누워있었다. 차가운 얼굴을 비비며 울어도 얼어붙은 엄마는 내 눈물로도 녹지 않았다.
엄마가 언니네 있을 때 만든 김치가 있다. 김치통을 열면 묵은 김치가 되어버린 그것은 관속에 누워있는 엄마처럼 움직임 없다. 그리고 그 쿰쿰한 냄새와 더 삭아졌는지 김치 주변에 생긴 기포는 엄마의 움직임이고 엄마의 냄새 같았다. 몇 포기 안 되는 묵은 김치는 삶이 다한 주검의 어미처럼 거무칙칙하다. 냄새도 퀴퀴하다. 내가 없는 동안 언니는 자주 이것을 보면서 울었을 것이다. 지금은 엄마가 만든 묵은 김치가 없다. 그것은 언니의 몸속으로 들어가 엄마의 사랑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언니의 세포 속에 머물고 있던 가족에게 받은 아픈 덩어리들을 그 묵은 김치는 엄마를 대신에 반창고처럼 붙어 있어 언니의 상처를 엷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엄마의 손이 뭍은 물건도, 묵은 김치도 없지만, 아직도 관 뚜껑을 들어 올려 봤을 때의 엄마 모습과 엄마가 만든 묵은 김치에서 나는 향이 내 몸속에 똬리를 틀어 나의 상처를, 그리움을 만져주고 있다. 이제 나 자신도 자식들에겐 늙은 어미의 길에 서있다. 내가 그랬듯 나의 자식들이 나에게 향을 맡으며 위로를 받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엄마의 묵은 김치처럼, 나의 자녀도 묵은 사랑을 그들만의 감정으로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