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장소처럼 우중충한, 그러나 자세히 보면 우직한 성전들의 기품에 탄성이 절로 나오는 로마에서의 마지막 밤. 여행의 끝자락에서 마신 달큼한 와인이 집으로 가야 하는 마음을 달래는지 온몸이 노곤하다. 샤워만 겨우 하고 짐도 정리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오래전부터 원하던 유럽 여행의 마지막 밤인 오늘이 여행 첫날이면 얼마나 좋을까.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나라를 다니느라 깊게 관찰하진 못했어도, 짐을 매일 싸는 번거로움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다. 10여 일 동안 서유럽 여행이 오늘 밤이 지나면 마지막이라는 게 아쉬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버지니아 댈러스 공항에서 출발하여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영국의 수도 런던이다. 그때가 4월 말 봄인데도 두꺼운 외투를 입어야 할 만큼 쌀쌀했다. 런던의 첫인상은 고집 센 그렇지만 우직한 장남 같은 모습으로 날씨마저 온통 회색빛이라 쉽게 가까이 갈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각지에서 온 여행 메이트들이 다 모였을 때는 오후였다. 여행사에서 무작위로 뽑아준 룸메이트는 불행하게도 코골이가 심한 사람이다. 유럽에서의 첫날밤은 설레기도 했지만, 먼저 곯아떨어져 코를 고는 룸메이트 덕에 방안에 있을 수 없었다. 잠을 잘 수 없는 핑계로 책 한 권과 $20 지폐 한 장을 들고 호텔 바에 갔다. 맥주 한잔 마시면서 책을 보다 들어갈 요량이었는데 달러도, 유로도 받지 않고 자기 나리의 돈 파운드만 받아 맥주를 마시지 못했다. 나는 내심 영국은 신사의 나라이니 달러라도 받지 않겠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혹은 손님 중 한 명이 달러를 유로로 바꿔줄 거라 기대도 했지만 아쉽게도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도, 손님 중에도 신사가 없었다. 영국의 신사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래도 유럽 첫날인데 싱겁게 잠을 자는 건 낭비 같아 로비의 테이블에 앉아 몇 시간 책을 읽으며 여행의 첫날을 보냈다.
영국의 런던 블룸즈베리에 위치한 영국 최대의 국립 공공박물관인 대영박물관을 가기 위해 아침부터 줄을 섰다. 제국주의 시대부터 여러 나라에서 가지고 온 약탈품, 그들에겐 수집된 유물들이 8백만여 점에 달하니 굉장한 규모다. 그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약탈한 문화재가 본국의 유물보다 많아서인지 관람하는 모든 이의 입장료가 무료라는 말에 강대국의 위엄과 잘못을 인정하는 배포가 인상적이다. 그래도 문화재를 보는 내내 한국의 문화재도 이렇게 약탈당하여 남의 나라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편이 조금은 찜찜했다. 세계 3대 박물관중 한 곳을 방문했다는 감동보다는 유물의 주인인 빼앗긴 나라의 아픔이 먼저 다가왔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거처하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살아있는 여왕보다 오래전 안타깝게 차 사고로 죽은 다이애나비가 더 생각났다. 생전 다이애나비가 서 있었다는 곳을 바라보며 그녀처럼 우아한 손동작을 따라 하며 런던을 떠났다. 그녀가 살아있다면 아마 내년이 환갑일 것이다. 어제 바에서 느낀 영국엔 신사가 없다가 아니고 유물과 다이애나비를 떠올리자 예전에도 신사는 없었다가 맞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