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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우 Mar 29. 2022

고독한 대학원생의 일상

서울의대 국제관 붙박이가 되어버린 어떤 이

2016년 여름,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도보 15분 남짓의 출퇴근길에 성북천 다리를 건너 다니면 낭만적일 것 같다는 생각에 성북구 보문동에 자취방을 얻었다. 2년 동안 성북천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계절을 체감했다. 석사 졸업 후 새로운 곳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종로구 동숭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두 번째 집에서의 출퇴근길은 도보 5분이었다. 마로니에 공원의 은행나무 잎이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노란색으로 변하고 떨어지는 것을 보며 출퇴근하는 것도 역시 낭만적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학교를 다니는 동안 수없이 많은 수업과 발표와 실험과 논문 작성의 시간이 쌓여 어느덧 ‘학생’보다는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이 익숙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 계절 부는 바람마다 가슴 앓던 이십 대 중반에서 어느샌가 좀처럼 슬프지도 먹먹하지도 않지만 그만큼 기쁠 일도 없는 삼십 대 초반이 되었다.


대학원생의 일상은 어떠한가. 어떤 공부를 하느냐에 따라 대학원생의 일상도 천차만별일 텐데, 풀타임 실험실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생태는 직장인과 비슷하다. 소정의 인건비를 받으며 (이 역시 연구실 별로 천차만별이다.) 매일 실험실로 출퇴근을 하고, 수업보다는 연구가 우선순위이며, 일과시간엔 대부분 실험, 연구계획서 및 보고서를 비롯한 행정 업무들, 미팅, 출장 등의 일을 한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논문을 읽거나 쓰고 시험공부, 발표 준비 등등을 한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고 남는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하는 여느 직장인과 다르지 않은 삶이다. 대학생 때 왕복 3시간 가까이 통학하며 학교-아르바이트-집만 오가던 단조로운 삶을 살던 나는 25살에 학교 근처에 살게 되면서 비로소 일상을 확대할 여유가 생겼다. 일상에 운동을 추가하고, 친구들과의 만남, 여러 취미활동들을 즐겼고, 간간히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어렵긴 하지만 할 만했고 즐거웠던 석사 과정과 달리, 27살에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정말 녹록지 않았다. 연구의 양적, 정신적 난이도도 상상 이상이라 새벽 퇴근을 밥먹듯이 하게 되면서, ‘내가 지금 이십 대 후반이구나’라는 사실이 체감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대학생 때까지만 하더라도 별로 못 놀아봤기 때문에 아무 갈등 없이 학업이 항상 우선이었고 아직은 어리니까 재밌는 삶, 취미와 사회 활동 등은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자연스레 하게 되겠지 싶었는데, 석사 시절 조금 노는 맛을 알아버리니 더 이상 라이프의 행복을 유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시기부터 가장 자주 했던 고민은 ‘지금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였다. 커리어에서의 성공, 잘 나가는 연구자가 되기 위해 혹독하게 앞만 보고 나아가기엔 청춘을 포기하는 것 같아 슬펐고, 뜨뜻미지근하게 살기엔 커리어에 대한 욕심과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 워라밸 워라밸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의 성공과 어느 정도의 소소한 행복에 내가 만족할 수 있을까? 정신없이 살다 보면 워라밸이 어느 쪽으로든 무너지기 너무 쉬운 환경이다. 특히 나는 박사 과정에 오면서부터는 내가 속한 집단에서 흔치 않은 포지션이기 때문에 실험실 사람들과 달리 혼자 다른 공간을 쓰고, 다른 종류의 연구를 하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고민하는 고독한 연구생활을 하게 되면서 더욱 그랬다. 일의 난이도도, 양도 무한이라 워커홀릭이 되기 쉽지만, 혼자 일하니 몇 달이고 외면하고 얼레벌레 시간을 보내기도 쉬운 것이다. 열정 넘치던 박사 과정 초반을 거쳐 나름 워라밸을 찾아가다가, 코로나 시대에 라이프가 무너지면서 외로움에 잠식되기도 했고, 또 워커홀릭에 가까워지다가를 반복하며 어느덧 박사 과정 8학기째, 슬슬 졸업 준비를 생각하는 말년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세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나의 세 번째 자취집이자 동숭동에서의 두 번째 거주 공간은 놀랍게도 내가 일하고 있는 연구 건물에 위치한 기숙사이다. 3층이 집이고 5층이 연구실이라 이제는 출퇴근길이 도보 1분인, 직주 초근접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내가 연구하고 거주하는 이 건물은 캠퍼스에서 500 m 정도 떨어져 있는 별관이다. 캠퍼스 내에 연구 건물들과 기숙사 단지가 있지만,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오고 가지도 않는 이곳(국제관)에도 연구실 몇 개와 기숙사 방들이 있다. 내 커리어 패스도, 캠퍼스에서 떨어진 별관에 존재하는 연구실도, 기숙사도, 전부 여기에선 비주류라는 생각에 고독함이 더 짙게 느껴져 이사를 온 계기로 다시금 소소한 일상의 루틴에 기대 보기로 했다.


기숙사로 이사 온 뒤로 사실 너무 쾌적하여 삶의 질이 좋아졌다. 자고로 이런저런 생활 루틴도 쾌적한 환경에서 가능한 법. 이전 집은 너무 추워서 이불 밖을 벗어나기 힘들었는데, 지금 이사 온 곳은 해가 잘 들고, 따뜻하고, 방음이 잘 되는 넓은 방이다. 이전에 살았던 원룸들보다 더 넓어서 자는 공간, 책상이 있는 공간, 커다란 빈백 소파에 앉아 쉬는 공간, 매트를 깔고 요가하는 공간을 다 나눌 수 있다. 뻥 뚫린 남향 뷰라 창가에 화분들도 키울 수 있다. 부엌과 세탁실은 공용이지만 여기 거주하는 대학원생들은 하루 종일 기숙사에 없기도 하고, 부엌을 사용하더라도 조리 정도만 하기 때문에 요리에 진심인 나는 넓은 부엌을 거의 전세 낸 듯이 매 끼니때마다 지지고 볶으며 신나게 사용하고 있다. 세탁실은 지하에 있어 살짝 번거롭지만 건조기 돌린 뽀송뽀송한 이불과 수건을 쓸 수 있기에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요즘 나의 주간 일상을 이러하다. 요즘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 기상하는데,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창가에 서서 잠시 햇볕을 쬔다. 3층에 위치한 나의 방 창문 밖에는 나무들의 가지가 닿아있다. 창틀에 올려 둔 나의 반려식물들도 한 번씩 확인한다. 얼마 전 심은 바질 씨앗이 언제 싹을 틔우나 매일 아침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화분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제는 창밖의 나무와 내 화분들이 계절을 느끼게 해 주겠지. 그러고 나서는 비대면 요가 수업이나 유튜브 요가 동영상을 보며 한 시간 정도 요가를 한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핸드폰만 달랑 들고 방 밖을 나서 계단을 올라가면 1분 만에 연구실에 도착할 수 있다. 얼음컵에 커피를 가득 내리고 자리에 앉아 일을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3층으로 내려가 냉장고에서 요리할 재료들을 챙겨 부엌으로 간다. 점심 식사 후 다시 연구실로 올라가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또 내려와 밥을 챙겨 먹고 다시 연구실에 간다. 평균적으로 저녁 9시에 퇴근을 하는데, 방에 돌아가면 씻고, 가습기에 물을 채우고, 빈백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며 쉬면서 차를 마신다. 그러다가 밤 12시 30분에 꺼지게 세팅해 둔 스탠드 조명이 꺼지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별 것 없지만 굉장히 바쁘다. 건물 밖으로 나갈 일은 좀처럼 없다. 하루 중 누군가와 만나거나 말하는 일도 거의 없다. 2주에 한두 번 정도 저녁에 사람을 만나거나 트레바리 모임에 나간다. 오미크론이 창궐한 시기지만 나름 안전함을 느낀다. 간만에 밸런스가 좋은 삶을 살고 있어 요즘 만족도가 높다. 루틴에 한 사람이 추가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스치지만 지금도 충분히 내가 바라던 삶이다.

올 한 해, 이곳에서 이렇게 평온한 일상을 보내다 보면 졸업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겠지. 기대되는 202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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