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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우 Mar 30. 2022

D에게

23살의 나와 너에게

안녕. 행복한 신혼생활 보내고 있니?

한 8년 만에 우리 같이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다시 읽었어.

읽어본 책이라는 것 밖에, 책 내용도, 너와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눴던 책이었던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야. 그 시절 내 트레이드 마크였던 파란 원피스를 입고 처음 너와 만난 날, 사실 난 처음 만난 너에게 전혀 이성적으로 끌리지 않았지만 우리가 아마 꽤 오랜 시간 함께 할 것이고, 너에게서 내가 넘치도록 사랑받을 것임을 예감했어. 사귀고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 내가 먼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까지 어쩜 그 어린 나이에 그토록 인내심이 많았는지 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줬었지. 우리 같이 처음 여행을 갔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한참을 뜸 들이다 조심스럽게 내뱉은 나의 “사랑한다”란 말에 그렁그렁했던 너의 작은 눈을 보면서 나도 정말 너에게 행복만 주고 싶었어. 우리는 서로에게 수백 개의 유치한 별명을 붙여주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우리만의 장난과 농담들을 만들며 깔깔거렸지. 너도, 나도, 서로에게 편지 하나는 기깔나게 잘 썼었잖아. 너는 나와 헤어지고 나서 나에게 받았던 편지들을 다 버렸다고 했지만 나는 네가 주었던 편지들을 아마 네가 결혼할 때 즈음까진 본가 서랍 속에 숨겨두고 가끔 읽어보곤 했었어. 말도 안 되는 표현들로 사랑을 넘치도록 외치던 연애 초반 편지부터, '미안해'와 '이제 정말 잘할게'가 거의 내용의 전부가 되었던 편지들까지 찬찬히 읽다 보면 언제부터 사랑이었고 언제부터 사랑이 아니었던 건지 느껴졌지만 그래도 모든 편지에 빼곡한 너의 애교와 노력들이 귀엽고 고마워서 가끔 편지를 읽으며 너의 생각을 했어. 

가장 예쁘고 불안했던 시절, 삶의 가장자리에서 부유하며 천천히 상해가던 내 옆에서 견뎌줘서 고마워. 매일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내게 제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속상해하던 어린 너에게 미안해. 어느 순간 더 이상 내가 너에게 있어 100%의 파란 원피스 소녀가 아니게 되었고, 너도 나를 수백 번 울리게 되었지. 그래도 우리는 서로, 아니 네가 더 최선을 다해 나를 견뎌냈다는 것은 그때에도 너무 잘 알고 있었어. 아주 열정적인 사랑이 무색하게, 23살이란 나이는 모든 것이 새로워 끊임없이 확장되는 시간이기에, 지금 돌이켜보면 약 500일이란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때에는 충분하리만큼 긴 나날들이었어.

언젠가부터 너의 뒷모습을 보면서 걸었던 지루하고 지겨운 날들 속에 곧 다가올 ‘400일 기념일에 서로 선물로 헤어지자’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둘 다 여러 번 했었어. 그래서 그날을 맞이 했을 때 울면서 정말 이제 그만하자고 서로 애원하다가 또 못 이기고 부둥켜안아버렸지. 다들 그렇게 유치한 청춘 영화를 찍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것 역시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짠하고 찡한 좋은 추억이야.

그렇게  달을  유예했지만 우리는 결국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했어. 그래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끝의 끝까지 노력했어.  귀찮고 짜증 나서 서로에게 매일   말을 날렸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하트를 붙이기로 했었지. 그래서 우리는 톡으로 싸우더라도 마지막엔  하트 붙였어.

사랑해ㅡㅡ(하트) 사실 사랑한다는 말은  이상 진심이 아니란  알지만 끝에 붙은 하트가, 우리의 최선의 노력이 위로가 되었어.


하지만 500일을 정말 며칠 앞둔 어느 날,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나의 말 한마디에 우리의 시간은 끝이 났지. 기다렸다는 듯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 그러자고 답한 네가 사실 비겁하다고 생각했어. 알잖아, 그때의 나는 정말 많이 노력했었거든. 결국 네가 먼저 이별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끝끝내 내 입에서 정말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 때까지, 너 나한테 솔직함을 가장하여 못되게 굴었었잖아.

24살의 1월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어떻게든 마셔보고자 뜨거운 물을 계속 붓고, 또 붓고 그래서 결국 더 이상 커피가 아닌, 맛없는 커피물만 잔뜩 차 있는 커다란 머그컵을 보는 느낌이었어. 마셔야 하나? 아니 쏟아버리고 새로 커피를 내려야지.


그렇게 말 한마디에 끊어져 모든 걸 불태워버린 산뜻한 마음에 각자 얼마 안 되어 또 새로운 사랑을 했고, 이별을 했어. 나랑 헤어지자마자 만났던 너의 그다음 여자 친구가 나중에 혼자 식어서 결국 너를 만나주지도 않고 잠수하다시피 이별을 고했다고 했지. 그동안 나도 너만큼 편하진 않고, 너만큼 다정하지는 않았던 사람과의 차분한 연애와 차분한 이별을 겪었어. 

너와 헤어진 지 2년 반이 지난 2017년의 내 생일날 12시가 되자마자 넌 나에게 연락을 했었지.

사실 기다렸어. 왜냐면, 우리를 연결시켜 줬던 너에게도 나에게도 친한 친구를 통해서 계속 간접적으로 서로의 안부를 들었잖아. 나와 점심에 만나고 저녁에는 너를 만나러 간다는 친구에게 웃으며 “D에게 나 잘 살고 있다고 전해줘~”라고 말했고, 그래서 나는 곧 네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연락을 해 올 것이라고 내심 생각을 했었어.

한번 밥이나 먹자고 해서 2017년의 여름 왕십리에 있는 어느 이자카야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 26살에 다시 만난 너는 나와 사랑했던 그때의 너의 모습이더라. 삶의 가운데로 자리 잡은 나 역시 그때의 너의 앞에선 당당할 수 있었어. 대학교 2-3학년에 만났던 우리가 둘 다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는 시간 동안에 서로 떨어져 자라났어도 여전히 너는 나와 많은 것이 놀랍도록 일치해서 말이 필요 없는, 남자 버전의 이미우였어.

그 뒤로 너와 몇 번 만나서 데이트가 아닌 데이트를 했었어. 비가 무지막지하게 내려 성북천이 다 불어난 여름밤에도, 우리가 각자 해외에 나가 있을 때에도, 네가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을 때에도 너는 내가 찾으면 항상 응답했고, 아무리 늦은 시간이어도 묻지도 않고 바로 나에게 와주길래 나는 좋으면서도 서글펐어. 명백히 우리가 다시 만나려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우리가 했던 이야기는 그 옛날 힘들어하던 나를 감당해야 했던 너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사랑이 다 식어버린 게 다 내 잘못 같다는 말과, 그래도 그렇게 비겁하게 말 한마디로 끝내게 해서 나한테 못할 짓을 한 것 같다고, 후회한다는 너의 말이 전부였어. 근데 감정이 슬슬 복잡해질 것 같으니,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고 너는 나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나를 또 갑자기 끊어버렸지.

나에게는 네가 또 갑자기 비겁하게 도망치는 느낌이었어. 근데 26살도 여전히 어린 나이라면 그런 거잖아. 26살에 다시 만난 너와 나는 한 번도 친구였던 적이 없으니 어떻게든 친구로 남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님은 분명하니까, 네가 말한 대로 다시는 보지 말고 각자 살아가는 게 맞는 거겠지. 아마 그 여름날 우리의 몇 번의 만남은 우리가 힘든 시간을 벗어나서 좀 성장했을 때, 서로에 대한 모든 미안함과 고마움을 털어버리기 위한 시간이었나 봐. 그런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이지.

작년에 네가 결혼하는 날, 너의 결혼식의 사회자를 맡은 나의 친한 친구가 SNS에 너의 결혼식 사진들을 올려서 실시간으로 봤어. 26살에서 30살까지, 억겁같이 긴 청춘의 시기에 나는 아주 많이 변해버렸으니 이제 네가 더 이상 남자 버전의 이미우일 리는 없을 거야.

지난 나의 고단한 연애사에서 가장 보편적인 사랑의 흥망성쇠를 함께 했던 너만큼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어. 너보다 더 사랑했다고 생각이 드는 사람은 여전히 아파서 말을 꺼낼 수도 없거든. 내 기억 속에 지나가버린 페이지처럼 존재하는 그때의 너와 나, 언제까지고 좋았었고 고마웠다고 여길게.

이제 더 이상 할 말은 없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


-너의 23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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