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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우 Apr 26. 2022

또 한 차례의 어떤 시간

슬픔을 이겨내는 법과 일기에 대하여

2019 8 16일의 일기


최근 살면서 아주 여러 번 겪어왔던 어떤 시점에 또 도달했다. 본질적 외로움과 공허함을 마주하게 되는 시간. 스스로 오롯이 책임져야 할 행복과 삶의 무게가 너무 버겁게 느껴지는 시간들.

나는 사람을 좋아하면서 싫어한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솔직하게 내 마음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내가 스트레스받을 때는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고 아무런 상호작용도 하고 싶지 않아 혼자 숨어버리는 편이다.

최근에 계속 연구실에서도 내 옆과 내 뒤에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또 가끔 나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들과 일을 하는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사회 활동도 피하고 싶었다. 연구실도 가기 싫어서 매일 아침을 한동안 미적거렸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혼자 있고 싶음'을 촉발시키는 여러 개인적인 맥락이 있었긴 했지만.

그런 상태가 몇 주 지속되는 동안 나를 달래고, 달래고, 아니 사실 외면하고, 내일은 괜찮아지겠지, 내일부터는 다시 열심히 살자 하고 넘기던 마음이 어느 날 폭발했다. 생각 없이 영화 우주전쟁(뜬금없이 외계인이 지구를 다 때려 부수는 영화)을 보다가 왜 저렇게까지 간절히 살아야 하는지, 보는 내가 너무 지겹고 지쳐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문득 내가 죽는다면 스스로 끝내버리는 길이 제일 유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미 옛날에 봤었던, 별 것 아닌 영화를 보는 중간에 엉엉 한참을 울어버렸다.

항상 쉽게 주어지는 행복은 일시적이거나 내 것이 아니라고,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행복이라는 것은 부단히 노력해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노력을 하는 것도, 매일을 침잠하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않고 발버둥을 쳐야 하는 것이 지쳐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밉고 싫은 나 스스로와 이별하고 싶었다.


'나는 매일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다 놓아버리기엔 나중에 뒷감당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냥 죽어야 하나? 어떻게 죽는 게 제일 깔끔할지, 죽기 전에 한 달 월급 며칠 만에 다 쓰고 죽을까? 그냥 다 때려치우고 여행이라도 간 다음에 죽을까? 아니, 그러다 다시 살고 싶어 지면 안 되니까 그냥 죽는 게 낫겠다.'

자려고 누웠다가 다시 앉아서 울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다.


좀 많이 마음이 약해져 있는 순간도 잠시뿐이다. 예전에도 이랬을 때에 어떻게 했었나 일기에 썼던 것을 찾아봤다.

2018년의 어느 날도, 2017년 어느 날도, 그 전에도 이런 시간들이 있었다. 힘든 순간에 나를 구원해주는 사람은 나 자신뿐. 26살, 27살의 내가 미래에 또 이런 시간을 보낼 나를 위해 써놓은 글들도 다 지금 하는 생각들과 똑같다. 순간을 또 잘 넘기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왔었지.

우울함과 공허함이 터져서 피크를 찍고 지난 일주일간 또다시 치열하게 힐링했는데, 미래에 또 힘든 시간이 찾아올 나를 위해,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가 요 며칠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록해보려고 한다.


책 읽기

걸 클래식 컬렉션이라고 우연히 광고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하는 힘 아닐까?"라는 빨간 머리 앤의 구절을 소개하는 것 보고 바로 사버렸다. 책은 언제나 옳다.


월화 휴가를 내고 남자 친구를 따라서 대전 가기

남자 친구의 가게가 있는 도안 신도시는 엄청 널찍하고 사람도 거의 없고 내가 살고 있는 서울 혜화랑은 정말 다른 분위기다. 사람을 마주치고 싶지 않지만 또 아예 혼자이고 싶지 않아서 남자 친구의 가게에서 같이 하루 종일 있었다. 혼자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읽고 멍을 때리고 남자 친구가 주는 차도 마시고 파스타도 먹었다. 새로 산 빨간 머리 앤 책을 들고 갔는데 읽으면서 몇 번이나 울컥했다. 혼자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남자 친구의 일상을 이틀 동안 엿보니 그도 하루 종일 혼자서 힘들고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친구와 만남

아침에 같이 대전에 내려가서 남자 친구 가게에 있다가 월요일 저녁에 퇴근한 친구를 만나서 친구 집에서 잤다. 공무원이라 혼자 대전에 내려간 지 4년 차인 내 고등학교 친구는 차도 있고 아파트에 혼자 사는 (아직도 학생인 나와는 다르게) 완연한 어른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녀와 그동안  번씩 만났었지만 이렇게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공허함과 외로움과 지친 마음을 털어놓았더니 친구도 많이 그런 시간들을 지나왔다며 공감해주었다.

나도 알지, 누구나 다 겉으로는 잘 지내보여도 말하지 않는 내면의 폭풍들을 겪으며 산다는 것을. 친구가 보는 나는 아주 멋지고 능력 있고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해줬다. 그 말을 들으니 힘이 났다.

처음 가본 친구의 집에서 그동안 몰랐던 친구의 라이프 스타일을 느끼고 듣고, 나와는 다른 삶을 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가 어떻게 행복하려고 노력하는지 듣고, 나도 내 라이프 스타일을 이런 쪽으로 좀 바꿔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예를 들면 미니멀하게 집도 좀 정리하고 , 밤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일기 쓰기 같은 것.


화요일 새벽에 친구는 새벽 수영을 갔다가 출근하겠다며 더 자고 일어나서 알아서 가라고 했다. 오전에 친구 집에서 혼자 일어나 씻고 다시 남자 친구 가게로 가서 또 월요일과 같이 멍 때리고 책 읽고 하다가 화요일 저녁에 버스를 타고 서울에 혼자 올라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내 애인과 내 친구, 아주 어른스럽고 멋지고 자기 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의 담담한 일상을 이틀 동안 보면서 느꼈다. 그들도 나도 잘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 외롭고 힘든 시간들이 가끔씩 있지. 아무리 잘 살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공평하게 그런 시간은 존재한다. 하지만 나한테 그들이 있고, 그들에게도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위로가 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거겠지. 그런 게 삶인가 보다. 잘 살아내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존재로 힘이 되어주고 싶다.


휴일의 혼자 밤 산책

다녀와서 다시 출근한 수요일은 별 일이 없었고, 연구실에서도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할 이야기가 있던 사람과 술 마시며 대화를 하기로 했던 날이라 술을 마셨고, 집에 돌아온 순간부터 취해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남은 눈물을 조금 털어버리다 잠든 듯. 광복절이던 어제 목요일은 하루 종일 침대에서 미드를 보다가, 밤에 나가서 한 시간가량 동네 산책을 하면서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했다. 삶의 무게에 더 이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조그마한 용기를 내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 아닐까? 요 며칠간의 나의 힐링을 위한 노력이 기특해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또 나중에 힘든 시간이 찾아오겠지만 분명 이 시간을 견디고 살아낸 나는 또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깊고 단단한 사람이 되었고, 그러면 됐다.


2022 4월의 


즐겁고 행복할 때보다 활력이 없고 기분이 다운될 때 더 많은 것들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생각 역시 많아진다. 행복은 소소할 수 있다. 일어났는데 몸이 개운해서, 날이 맑아서, 점심에 해먹은 음식이 맛있어서,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좋다는 사소한 이유로 언제든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스트레스나 부정적인 감정에는 역치가 높은 사람이기에, 내가 울적함을 느낄 때면 제법 사유가 중대하거나 아니면 복합적인 이유일 때이다. 그럴 때일수록 일기를 쓴다. 커다란 감정 덩어리는 찬찬히 생각하며 글로 풀어보면 어떤 것으로부터 기인한 나의 생리적, 인지적 반응인지 명확하게 보이고 다루기가 조금 쉬워진다. 그렇다고 삶이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히 객관적이고 건설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위의 일기를 쓰고 한 달쯤 뒤, 몹시 사랑했던 남자 친구와 갑작스럽게 이별을 했다. 그때에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길고 긴 일기를 썼다.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연애를 함으로써 변화된 모든 모습에 대한 평가도, 그 사람을 그토록 사랑했었던 이유도, 연애가 끝나서 좋은 점, 어떻게든 이겨내고 잘 살아갈 것임을 알지만 너무 절망적인 솔직한 마음도 모두 적었다. 일기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사람이라 여길 수 있을까? 언젠가엔 웃으면서 "그땐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안 보고 오직 사람만 보고 너무 사랑했었어~ 그땐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었는데 좋은 추억이었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3년이 지난 지금은 말할 수 있다. 난 그 뒤로 생각보다 오래도록 그때에 멈춰서 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지나갔다. 언젠가는 ~할 수 있을까? 의 그 언젠가는 2년 반 정도 걸렸지만 확실히 왔다. 행복했던 기록,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했던 흔적,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리고 눈물 흘리며 써 내려간 지난 나의 자국들이, 지금의 나로서는 나의 일이었다기보단 이전에 읽었던 소설의 한 페이지처럼 느껴진다. 기억보다는 기록이 언제나 정확하다. 아무리 강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날아가 희미해지고 재평가가 되어 다르게 기억된다. 하지만 기억은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내 의식의 나보다 나의 일기가 더 나를 정확하게 낱낱이 잘 알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나는 과거의 나를 만나고 덧붙여 계속 써 내려간다.

나는 일기가 아니지만 일기는 내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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