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메리들에게

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by 미수



메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의 현 위치에서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p.64


소설은 살인 사건에 대한 신문 기사로 시작한다. 피해자는 메리 터너로 시골에 살고 있는 여성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아무도 그 살인사건을 입에 올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을 설명해 줄 입장에 있는 당사자들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밝혀지지 않은 사실까지도 육감을 통해서 짐작하는 것 같았다. 터너 부인 살인 사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2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기묘했다.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한 가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텔레파시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는 새처럼 행동"(p.13) 하며 언급을 자제했다. 이들 부부는 마을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는데, 외부인과 교제를 끊고 축제나 운동회 등의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리에 대한 평판이 특히 나빴는데, 그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남편 리처드 터너를 동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메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른이 되었을 때까지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서른이 되던 생일날, 세월이 그토록 빨리 흘러가 버렸다는 사실에 대해 메리는 희미하나마 놀라움을 느꼈지만 불안할 정도도 아니었고 전혀 달라진 점도 없었다. 서른 살! 정말 엄청난 나이다. 그러나 메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나이였다.
p.58


메리는 도시에서 꽤 멋진 직장 생활을 하던 여성이었다. 여가시간에는 갖가지 취미를 즐겼고 그때마다 주변에 남자가 있었으며 친구들도 많았다. 메리는 행복했다. 친구들의 뒷담화를 듣기 전까진.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졌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결혼처럼 대담한 일은 결코 못 할 여자야"(p.66) 등의 이야기를 엿들은 메리는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태로운 모부의 결혼 생활을 보며 결혼 자체에 큰 흥미가 없었던 그는 급하게 결혼할 남자를 물색하고, 리처드 터너라는 농부를 만나 그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하게 된다. 메리는 리처드를 따라 시골로 거처를 옮긴다. 시골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들은 돈이 많지 않았고 남편 리처드는 우유부단해 사업을 여러 번 실패했고 그는 직장 다닐 때와 달리 그곳에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스트레스를 흑인 하인에게 푼다. 때문에 하인들은 버티지 못하고 금방 그만두었고 이에 짜증이 난 리처드는 농장 일꾼 중 가장 일 잘하는 원주민에게 집안일을 가르쳐 하인으로 삼겠다 선언한다. 메리는 그가 불편했는데, 리처드가 아파 대신 농장 감독일을 할 때 그를 채찍으로 후려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당시 흑인을 하인으로 삼는 건 가능했으나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처벌받을 수 있는 행위였다.)


그는 다른 하인들과 달랐다. 기독교 출신인 모세는 다른 하인들이 메리를 '마님'이라 불렀던 것과 달리 '부인'이라고 불렀고, 메리가 부당하게 야단을 쳐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메리는 발작적으로 울며 그를 붙잡는다. 그 후 이들의 관계는 기묘하게 변한다.



"제가 일을 잘 해요, 그렇죠?"
그는 영어로 말했다. 그녀는 원주민이 영어로 말하는 것이 건방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통 때 같았으면 그 말을 듣는 순간 걷잡을 수없이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똑같이 영어로 대답했다.
"그래."
"그런데 부인은 왜 그렇게 항상 방해를 합니까?"
그는 마치 아이를 어르는 양 제법 유머까지 실으면서 친근하게 말했다.
p.263



메리는 잠도 자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낸다. 리처드의 건강이 악화되며 이들의 관계 또한 극에 달한다. 이들 부부를 지켜보던 이웃 찰리는 농장을 탐내는 마음과 백인이 흑인보다 못하게 살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이들에게 농장을 팔고 이사 갈 것을 제안한다. 리처드는 계속 거절하다 합의점을 찾아 관리인을 두는 조건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고, 영국에서 온 찰리가 고용된다.


메리가 갑자기 말했다.
"나보고 나사가 하나 빠진 여자라고 그랬어요. 나사가, 나사가 빠졌다고……."
마치 축음기 바늘이 한 곳에 고정된 채 판이 계속 돌아가고 있는 듯, 메리의 말은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되었다.
"나사라니 무슨 나사말입니까?"
토니가 멍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나사라고 그랬어요."
p.319


토니의 개입은 모세로 하여금 메리를 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때쯤 메리의 상태도 극에 달해 망상에 시달린다. 터너 부부가 농장을 떠나는 마지막 날밤, 모세는 메리를 살해하고 원래 계획과 달리 자수하려는 마음을 내비치며 소설은 끝난다.




21세기에 이 소설을 읽는 나는 흑인을 대하는 백인들의 태도에 경악하며 읽었지만 이런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메리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흑인 하인들을 '훈계' 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처럼. 그런 태도를 갖기 않기 위해 항상 경각심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토록 경멸하던 아버지에게서 흑인 하인을 '훈계'하는 방법을 배워 써먹은 장면이나 흑인 원주민을 혐오하면서 흑인인 모세의 육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순적인 장면들이 인상 깊었다.

시대 배경과 나라가 다른데 메리의 삶이 지금 우리의 삶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소름이 끼친다. 도리스 레싱이 앞서갔던 걸까, 그로부터 여성의 시간이 흐르지 않은 걸까.


"부인은 베란다에 누워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침대 위에 눕혀 드렸죠"
(...)
"온통 피투성이였어요. 그래서 모두 닦아 버렸는데……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수사를 위해 그냥 놓아두었어야 했을 것 같더군요."
p.25


추리 장르 마니아인 나는 이 문장에 깜짝 놀랐다. 사건 현장을 훼손한다고?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그것을 문제 삼는 이는 아무도 없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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