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거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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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수

나 자동차 하나만 그려주면 안 돼? 포스터 그리기 대회나 각 종 수행평가 시간에 그런 부탁을 곧잘 받았다. 그 친구가 삼십 분씩 덧 그리고 있는 걸 나는 삼분이면 해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몇 개 그려줘도 시간 안에 완성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한 명의 부탁을 들어주면 서너 개의 부탁이 더 생긴다는 것이다. 나도, 나도 도와줘.
갑자기 억울했다. 내가 왜 그려주고 있지? 백일장도 한 문장만 대신 써달라고 하나? 싶었다. 그 이후로는 그런 부탁을 거절했다.

이런 부탁은 곧잘 거절하게 되었지만 만나자는 약속은 지금까지도 뭐라고 거절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얼굴을 보겠다고 굳이 시간 내서 만나자는 건데. 그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 매번 끌려 나간다.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번 거절하지 못해 만난다. 가서 그냥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대충 맞장구쳐 준다. 사실 머릿속으로 내내 딴생각한다. 내일 뭐 입지. 가끔 흥미를 느낄 때도 있다. 내 관심 분야의 이야기를 할 때.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이내 흥미를 잃고 해야 할 일 목록을 정리한다. 집에 가서 세수하고, 서평 쓰고, 남은 책 마저 읽기.

이런 식의 만남은 서로에게 마이너스인 것 같아서 나름대로 거절 방안을 궁리해봤다. 시간이 안 맞는다고 하기. 당연히 써봤다. 내 시간에 맞추겠다며 언제 시간이 되는지 계속 물어봐서 실패했다. 아프다고 하기. 몇 번은 먹혔으나 사람이 매일 아플 수는 없고 거짓말에 면역이 없어 조마조마하다 그만뒀다. 역시나 실패다.

나는 거절이 어려워 회피한다. 고백도 빙빙 돌아서 피했다. 고백받기 전에 끊어냈다는 말이다. 그걸 뭐라고 거절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핸드폰 번호를 바꾸든 메신저를 탈퇴하든 학원을 옮기든. 혹은 나를 싫어하게 만들든. 어떻게 해서든 고백받는 상황은 피하려고 했다. 이 모든 걸 넘어 고백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도 거절하지 못하고(더 이상 쓸 방법이 없으니까) 어거지로 연애를 시작했을 거다. 다행히 아직 그렇게 끈질긴 사람은 못 만났다.

주변 사람 여럿에게 물어봤으나 썩 괜찮은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다들 내가 써 본 방법을 추천해줬다. 그런 게 먹혔으면 나도 안 물어봤지…….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면 서로 기분 상하지 않는 완곡한 거절 방법을 알게 될까? 아직은 거절이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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