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벽

백수일기 18

by 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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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15일 차, 50일 넘게 유지하던 스픽의 불꽃이 꺼졌다. 100일을 채워서 기념품 티셔츠를 받으려던 야침찬 꿈은 물거품이 됐다. 채용 과제와 면접 때문에 이틀간 백수 생활 루틴이 깨졌고, 결국 스픽을 홀라당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침에 스픽 앱을 켜고 사라진 불꽃을 보며 혼자 우울함을 달래던 중 한 곳에서 서류 통과 연락을 받았다.


직무가 잘 맞아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던 곳이다. 그런데 면접 안내에 이상한 단어가 보였다. 있어서는 안 될 내용이 메일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바로 '영어 면접'이다.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 아래서 자라 여행 말고는 한국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토종 코리안. 수능이나 토익에서 점수를 만드는 건 할 수 있어도 입 밖으로 영어를 말하지 못하는 문제적 영어 교육 시스템의 산물인 나는 영어를 쓰며 일해야 하는 곳에는 절대 지원하지 않는다. 크게 데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토익 점수가 900점이 넘는다는 이유로 인턴 시절에 영어로 서비스와 많은 상품을 설명해야 하는 행사에 차출된 적이 있었다. 챗 GPT도 없던 시절이었다. 글로벌 직무로 들어온 다른 인턴에게 부탁해 사용해야 하는 영어 문장을 모두 스크립트로 만든 뒤 달달 외워서 행사장에 나갔다. 겨우 상황을 모면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영어를 말해야 하는 직무에는 지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행사장에 있는 동안 실시간으로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이후에 인턴 시절의 경험을 보고 한 회사에서 1차 면접을 제안했다. 면접관이 "아, 그럼 영어로 이런 업무 가능하시겠네요?"라고 묻자마자 나도 모르게 "아뇨"라고 답해버렸다. 뇌를 거치지 않은 답이었다. 당연히 면접에서는 떨어졌다.


그 이후로는 영어를 많이 쓸 필요가 없는 곳에서 쭉 일을 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만 가진 채로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영어 면접을 보라고? 인사 담당자 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분명 자격 요건에는 영어 능통자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인사 담당자는 공고가 잘못 올라간 것이라며 사과했다. 영어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말에 채용 전형을 더 진행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스픽 불꽃이 사라진 날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오늘 하루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영어인 모양이다. 오늘 별자리 운세나 띠별 운세를 봤다면 '영어 때문에 발목 잡힐 가능성이 높아요. 무리해서 시도하지 마세요. 행운의 아이템: 영어 교육앱' 같은 말이 나왔을 것이다.


괜히 어정쩡한 실력에서 멈춘 영어가 오늘따라 아쉽기만 하다. 백수가 된 후 공고를 볼 때마다 영어 때문에 기회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갑자기 하루아침에 비즈니스 영어가 가능한 수준으로 실력을 끌어올릴 수도 없다. 영어 때문에 고생하던 인턴 시절에 죽을 각오로 영어를 공부했다면, 지금 이런 후회를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까? 영어의 벽을 마주한 백수는 심란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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