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22
백수 19일 차. 운수 좋은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에어컨을 켜고 샤워를 했다. 이른 시간대의 면접에 가기 위해 여름 정장을 걸치고 불편한 로퍼에 발을 구겨 넣었다. 바깥은 흐리고 축축했다. 아, 피곤해. 가기 싫어. 그래도 어떡해 가야지. 자문자답을 하며, 여섯 시간도 못 잔 탓에 퀭한 눈을 억지로 뜨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익숙한 역사 안에서는 웅얼거리는 안내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2호선이 말썽이었다. 방금 뜬 인터넷 뉴스에는 단단히 화가 난 직장인들의 댓글이 가득했다. 왜 하필 2호선 역삼역으로 면접을 보러 가야 하는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이건 면접 액땜인 거라고.
면접 전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은 꽝이다. 빙빙 돌아 면접 장소 근처로 가자 이미 면접이 20분 남은 상태였다. 편의점에서 물 한 병과 마이쮸를 사서 느릿한 걸음으로 면접을 볼 회사를 찾아갔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한 회색빛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보고, 심호흡을 한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면접관은 두 명이었다. 본격적인 질문 전 설명하는 내용을 들어 보니, 사실상 와해된 팀을 다시 빌딩하는 상황인 듯했다. 지원자로서 직무를 잘 아는 사람이 면접관인 것과 아닌 것은 천지차이다. 면접 질문은 뭉툭하고, 의도를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을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상냥하게 답하고 있던 중, 면접관 한 명이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사실 우리는 뭐랄까요. 믹서. 믹서처럼 잘 갈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믹서기고, 직원은 그 안에서 갈리는 채소나 과일쯤 된다는 뜻인가요?'라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냥 일어나서 면접장을 터벅터벅 걸어 나가고 싶었다. 비슷한 종류의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이런 의미를 담은 말에는 초연하다고 생각했다. 업무 강도가 높다거나, 2명이 할 일을 1명이 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곳은 이미 여러 번 겪었다. 인성에 문제가 있어 보이거나 나르시시스트 같은 면접관도 많이 겪었다.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더니, 이제는 면접을 보러 가서 믹서기에 갈릴 사과나 당근이 되라는 말까지 듣게 되는구나.
황당한 낯을 지우고 짧게 웃었다. 잘 갈리겠다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대답해야 좋은 지원자일까. 아직도 사회생활 짬이 부족한 건지 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열심히 하겠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 건 을의 알량한 자존심 탓일까.
면접이 끝날 때까지는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면접관들은 말이 많았고, 포트폴리오에 있는 것들을 캐물었지만 잘 이해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믹서기 타령을 하던 면접관 앞에서 대충 웃었던 순간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로비를 나서자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행인이 보였다. 흐리고 축축하다 싶더니 역시 비가 쏟아졌다.
가방에 있던 우양산을 펼치고 터벅터벅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데 고소한 튀김 냄새가 났다. 이미 망한 면접, 붙어도 다닐 만하지 않은 곳은 잊기로 하고 점심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방금 면접을 본 곳에서 전화가 왔다. 2차 면접을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시원한 방에 드러누워 2차 면접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만 들었다.
"메일로도 안내드릴게요"
쉬지 않고 말을 하더니 같은 내용을 메일로 다시 안내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일단 밥이나 먹자고 배달 앱을 켰다. 돈가스를 먹어야겠다. 좋아하는 가게에서 신중하게 메뉴와 사이드 메뉴를 고르고 결제를 하려는데, 그 짧은 찰나에 주문이 막혔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정말 운빨 죽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