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팀라이트 매거진

라이킷 48 댓글 14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김글향 Sep 13. 2021

나만 보는 명절 특선영화

이젠 그만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학 사전에서는 '명절 증후군'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명절 증후군이란? 명절을 보내는 동안 심신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느끼는 증상으로 과도한 집안일과 가족 간의 갈등이 주원인이라고 한다. 그 아래에는 더 친절하게 '주부들이 명절 증후군에서 벗어나는 길은 휴식이 제일이다'라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남들과 다른 종류의 명절 증후군을 앓고 있다. 과도한 집안일로 심신의 피로를 느껴본 적은 있지만 그런 것은 스트레스보다는 오히려 즐거움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친척들을 위해 그 정도는 기꺼이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남들과 다른 종류의 명절 증후군은 어쩌면 그 뒤에 오는 '가족 간의 갈등이 주원인'이라는 항목에 포함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에게만 상영되는 명절 특선 영화

조금 있으면 다가오는 명절. 명절이면 으레 있었던 집안 풍경들을 떠올려본다. 한산했던 시댁과는 달리 친정은 늘 북적북적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했다. 우리 집이 큰집은 아니었지만, 큰 아버지께서 많이 편찮으셨기에 둘째 아들이었던 아버지 편으로 모든 명절과 제사의 책임, 역할들이 주어졌다. 물론 수많은 일들은 엄마의 몫이었다. 나는 어느 정도 거드는 시늉만 하다가 시집을 갔고, 어느새 남편과 아들을 달고 와서는 음식을 수거해가는 역할에 충실했다. 명절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빼곡히 들어찬 신발들을 비집고, 더 이상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정리는커녕 신발 위에 신발을 대충 포갠 후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 한가운데는 커다란 상이 놓여 있고, 다닥다닥 붙어않아서 메인 셰프 엄마와 보조 셰프 숙모들이 만들어 놓은 명절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양심상 설거지와 잔 심부름 정도는 나와 사촌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많은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먹으며 시끌벅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카들의 재롱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어른들의 표정, 명절의 참맛이라도 느끼는 듯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헤매다 명절이 되면 머릿속에서 어김없이 상영되는 명절 특선 영화. 나만 보는 그 영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지난날의 명절 이야기들이 남들과는 다른 나의 명절 증후군이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의 존재와 함께 아버지 쪽 친척들의 연결고리가 너무도 허무하게 툭 끊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풍경 속으로... 꼭꼭 묻어두었던 아픔들이 해마다 명절이 되면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에서 매년 절찬리에 상영 중이다. 오붓하고 조용해서 세상 편하고 좋다는 친정엄마의 외침이 그렇게도 시리게 들려온다.

동병상련 텔레파시 덕분에

남들과 다른 종류의 명절 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얇디얇은 상처의 틈을 비집고 찬 공기가 쓱 들어와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달라진 온도차에 몸과 마음이 금세 적응을 했기에 괜찮아졌다. 그리고 또 하나, 남편과 나눌 수 있는 동병상련 텔레파시! 시댁의 명절 풍경도 한산 그 자체다.

시집와서 초기엔 달라도 너무 다른 명절 풍경에 나도, 남편도 적응하기가 꽤 어려웠다. 서로 눈치 아닌 눈치가 보일 정도로 대놓고 말하기엔 좀 애매했던 명절의 기운들이 우리 부부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언젠가 남편이 어렵게 꺼낸 말로 인해 알게 되었다. 원인 모를 그 기운의 밑바닥에는 너무 뜨거웠던 친정 온도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겪었던 남편의 마음과, 그 마음을 느꼈던 나의 마음이 더해져서 명절만 되면 우린 때아닌 눈치 작전에 휘말렸던 것이었다. 우습게도 이제 우린, 동병상련의 텔레파시로 인해 서로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 되었다. 그런 것이 좋은 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지만 어쨌든 괜찮아진 요소 중에 하나임은 분명했다.

슬픔이라는 판결 대신 자유를 즐기기로

해마다 상영되는 나만 보는 명절 특선영화를 이제 그만 보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명절은 이런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으레 느껴야 할 명절 기운들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슬픔'이라는 판결을 내리기보다 '자유'가 주어졌음을 감사히 여기기로 생각을 바꿨다.

명절에 햇빛을 쬐거나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즐길 수도 있고,

빠른 템포의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음식을 해먹을 수도 있고,

평소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모든 것들을 마음껏 펼칠 수도 있는

그런 자유가 주어졌음을 감사히 여기는 것

해마다 주어지는 길고 긴 명절 연휴에

자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며 살아가기로

이렇게 또 글을 쓰며 마음을 고쳐먹어 본다.

글쓰기로 우주 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 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 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