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는 결핍으로부터 시작된 존재이니까.
'명절'은 '전통적으로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마다 즐기고 기념하는 날'을 말한다.
그러나 말 그대로 '대부분의 사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적용되진 않는다. 명절 때마다 일각에선 소외되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가족이 없거나,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명절에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명절은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허전한 마음을 더 모자라게 만드는 일종의 결핍이다.
명절은 어렸을 적 나에게도 풍요로움보다는 결핍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는 친인척 간 왕래의 부재를 의미했다. 그 빨간 날들은 학교를 가지 않는 휴일일 뿐, 명절의 의미는 내게 크게 와닿지 않는 무엇이었다. 물론,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큼지막한 동그랑땡은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명절의 추억이다. 손이 크신 어머니의 동그랑땡을 토마토케첩에 찍어 먹는 순간, 명절은 시작되었고 다 먹지 못해 남긴 동그랑땡을 냉동실에 넣을 때 명절은 끝났다.
최근 명절의 의미는 변화되고 있다.
본래의 명절이 함께 모여 조상을 기리고 친인척 간의 정을 나누는 것이라면, 왜곡된 모습은 고부갈등이나 결혼, 취업 등의 원하지 않는 질문들로 나타났다. 성질 급한 우리네 특성상, 벌초와 제사를 미리하고 휴일을 해외여행으로 즐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혹자는 우스갯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상 덕 보는 사람들은 이미 해외에 나가 있고, 꼭 조상덕 못 본 사람들이 제사상 차리면서 서로 지지고 볶는다"라고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순간 올라간 입꼬리의 끝에서 쓴맛이 베어 나와 입안 전체를 아우른다.
지금도 내게 명절은 풍요롭지 않다.
두 번째 해외 주재 생활을 하면서 이미 몇 번의 명절은 내게 적용되지도 않았거니와, 조상 덕을 보고 있다거나 활발한 친인척 간의 교류는 여전히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엽거나 슬프지는 않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어머니에게 얼마간의 용돈을 조금 더 드리면 그나마 뭔지 모를 결핍은 채워진다.
조상 덕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든.
명절엔 몸과 마음을 돌보며 편안히 쉬길. 서로 지지고 볶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한 번 더 이해해주는 휴일이 되길.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며 의미 있는 하루가 되길. 명절이라서가 아니라, 채워진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명절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길.
결국, 우리는 결핍으로부터 시작된 존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