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불이 난 사건 기록
2021년 12월 9일 오전 11시 6분
앞으로 이 날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엄마 집에 불이 났다
오후 12시경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고? 큰일 났다. 우리 집에 불났다. 여기 복잡하니까 택시 타고 와봐라." 엄마의 전화를 받고 정신이 혼미했다. 불.. 불이 났다니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이 안 되었다. 남편과 함께 급히 집으로 날아가 보니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인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공중파는 물론,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열띤 취재를 하고 있었고 뉴스, 신문, 인터넷 기사 등 모든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큰 불이 난 것이다.
<속보> 9일 오전 11시 6분쯤 부산 동래구의 9층짜리 오피스텔에서 불이 나 모두 21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16가구가 사는 오피스텔에서 갑자기 불이 나자 놀란 입주민들은 오피스텔 밖과 옥상으로 긴급 대피했습니다. 하지만, 불길이 건물 외벽을 타고 위로 번지는 데다 연기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서 옥상으로 대피한 입주민 8명은 한때 고립됐다가 구조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화재로 지하 1층 작업자와 입주민, 소방관 등 모두 21명이 중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경찰은 당시 지하 1층에서 용접작업을 하던 중 불꽃이 튀면서 불이 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불은 3시간 만인 오후 2시쯤 진화됐습니다.
- SBS NEWS 송인호 기자 -
불구경을 하는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서 소방관들이 불을 진압하는 광경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 집은 7층이었고, 불길은 6층까지 번진 상태였다. 소방관들이 엄마 집에 들어와서 스프링 클러 제거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불행 중 다행히도 집 안은 불길이 번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려 3시간이라는 사투 끝에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며칠 전부터 지하 주차장 공사가 시작된다는 안내가 있었고, 주차장 공사 시작과 동시에 작업자의 실수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었다. 더 섬찟한 것은 불꽃이 빵 하고 터지기 5분 전에 엄마는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집 밖으로 나왔고, 약속 장소로 향하던 중에 불이 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불이 난 이후 수습의 과정들
살면서 이렇게 큰 사건을 겪을 일이 또 있을까? 너무 큰일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멘붕 사태를 겪게 된다. 나 역시도 내 일이 아닌 것 마냥 너무 낯설게 느껴졌고, 당장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곁에 있던 남편이 이성적으로 발 빠르게 움직여주었다. 우선 소방대원분들께 현재 상황을 물어 집 안까지 불길이 퍼지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고, 혼이 빠져있는 전체 입주민들을 대표해서, 구청,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분들을 소환했다. 그리고 이후 절차 및 상황들을 공지했고, 현재는 그 절차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집에 불이 난 이후 밟아야 하는 절차들을 간략히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1. 제일 먼저 119에 신고하기
2. 소방관의 안내에 따라 대비한 후 불길 진압과정 살펴보기
3. 구청, 동사무소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하여 입주민들과 면담하기(화재 이후 행동 안내: 대체 거주지, 구호 물품, 일주일 동안 생활 지침 안내받기)
4. 화재 원인에 따라 손해사정 법인 및 보험사와 연락 취하기
5. 업체 측의 과실일 경우, 입주민 단톡방을 만들어서 손해사정사와 화재 관련 관계자를 초대한 후 처리 절차를 공유 및 소통하기
6. 입주민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손해사정사의 안내 조치 및 쌍방향 소통을 통해 단합하여 사건 처리에 힘을 모으기
7. 위임장 및 집안 피해 내역 작성하여 제출하기
8. 장기전을 각오하고, 피해 보상 절차에 임하기
분명 불행한 일인데 자꾸만 감사함이 몰려든다
집에 화재가 발생하는 사건은, 살면서 누구나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이런 경험이 나에겐 과거가 아닌 현재 속에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의 현재는 불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불행하지 않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다행히 나의 상황은 엄마가 무사하고, 앞으로 차근차근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주어졌기에 지금으로썬 불행하기보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 엄마 집에 불이 났는데, 온통 감사한 일들이 가득하다니! 도대체 무엇이 감사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감사한 일들을 기록해보았다.
< 이 와중에 감사한 일들 >
* 불이 났을 때 내 일처럼 대처해주신 소방관, 경찰관, 구호단체에 감사하다.
* 엄마의 몸이 무사해서 정말 감사하다.
* 이런 상황에서도 씩씩하게 대처하는 엄마의 건강한 마음이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 곁에서 지켜주고, 안절부절못하는 엄마와 나를 침착하게 이끌어준 남편에게 더없이 감사하다.
* 손 놓고 당할 수밖에 없는 불행이 아닌,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음에 천만다행으로 감사하다.
* 성숙된 시민의식으로 단합하는 빌라 이웃분들께 감사하다.
* 주변에서 함께 걱정해주고 위로해주었던 지인분들, 브런치 이웃 작가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하다.
*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 사소한 불행들이 한 번에 묻혀버린 것도 감사하다.
*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도 감사하다고 말하는 나여서 감사하다.
엄마 집에 불이 난 것은 분명 좋은 일이 아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갑자기 찾아온 커다란 불행이다.
좋은 일도 아닌데, 커다란 불행이 뚝떨어진 것인데, 이렇게 글을 쓰는 게 맞는 건지.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소문이 날수록 집의 가치만 더 떨어지는 일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왜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아마도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겪은 힘든 경험에 빚대어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너무 뻔하디 뻔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 속에서도 감사함이 몰려들었던 소중한 경험을 통해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혹은 겪고 있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고, 나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도 함께 힘내자고 말하고 싶다.
"이번 일로 큰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입주민분들 모두 힘내시길 바랍니다. 특히 지금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계시는 환자분, 그리고 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건네며 빠른 쾌유를 빌겠습니다. 우리 함께 이 어려움을 잘 해처 나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