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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향 Mar 02. 2022

시간을 낭비하는 여행이 좋더라

여행을 즐기는 힘은 릴렉스(Relax) 타임에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행이 있다.

철저한 계획 하에 시간을 나노 단위로 쪼개어 쓰는 여행

무계획 하에 시간을 통으로 쓰는 여행

몇 년 전, 태국으로 떠난 여행에서 두 가지 버전을 모두 경험한 적이 있었다.


태국 여행은 바쁜 아빠들을 제외하고, 엄마와 아이들만 떠나는 여행이었다. 학부모로 만난 친한 언니와 아이들, 나와 아들. 이름하여 과부 버전의 여행이다. 아이와 해외로 떠나는 여행이 내심 불안했던 나는 여행 전부터 철저히 계획했다. 여행사를 선정하는 것만도 꼬박 이주는 고민했던 것 같다. 선정기준은 '일주일 동안 누가누가 더 뽕을 뽑아주나'였다. 언니와 나는 틈만 나면 분석에 들어갔고, 우리의 조건에 충족하는 <가격은 비교적 착하면서, 일찍 기상, 많은 체험을 시켜주는> 여행사 패키지로 의견을 모았다.    


어디 그뿐인가. 짐은 또 얼마나 한가득 꾸려놓았는지. 날짜별로 입을 옷, 비상식량, 비상 약품, 심지어 책 두 권에 고데기까지.. 짐을 쌀 때 정신이 살짝 가출했던 것이 틀림없었던 것 같다. 지퍼를 잠그려면 가방 위에 올라타야 할 정도로 빵빵하게 짐을 싸고, 그 짐은 여행 내내 말 그대로 짐 덩어리였다.


태국 땅을 밟자마자 열정 엄마들이 선택한 패키지를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아이들. 무거운 짐까지 가세하여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가고, 여행 3일째 되던 날에는 아이들의 입에서 이제 제발 집에 좀 가자는 말이 나왔다. 뜨거운 햇볕 아래 이국적인 풍경이 물씬 느껴지는 사원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이었다. 연신 찍어대는 엄마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웃어주는 착한 아이들. 그 모습을 보며 추억을 위해 사진을 찍는 건지, 사진을 위해 추억을 찍는 건지 모를 혼돈을 느꼈다. 그리고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우리 하루 일정 그냥 포기하자. 가이드님께 양해드리고, 편안하게 호텔 수영장에서만 노는 거 어때?" 언니도 내심 바랬던 눈치였다. 다행히 그날은 일정 중에 숙소를 옮기는 날이었고, 숙소 이동 후 또 다른 관광이 있었지만 우리는 쿨하게 포기했다. 숙소에서 시간을 낭비하기로 한 것이다.


딱 좋은 온도의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온종일 물 안에서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들.

비치 의자에 앉아 손이 느린 바리스타의 핸드드립 커피를 홀짝이며 수다 삼매경에 빠진 엄마들.

비로소 여행의 묘미가 느껴졌다. 그때 알았다. 모든 여행에는 시간을 낭비할 권리도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자 아빠가 아이에게 물어봤다. "뭐가 제일 재밌었어?" 살짝 불안했는데 역시나, 코끼리 체험, 악어 쇼, 사원, 박물관, 각종 문화 탐방 따위를 들먹일 리가 만무했다. "호텔 수영장에서 물 놀이한 게 제일 좋았어! 수영장 미끄럼틀이 엄청 재밌었어."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체험을 해맑게 떠올리는 아이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그 후로도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만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그렇게 열심히 찍어놓은 사진은 다 어디로 간 건지...)



+

여행 내내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짐과

빡빡한 일정으로 채웠던 불필요한 욕구들로 인해

주어진 시간이 힐링타임인지 킬링타임인지 모를 정도로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여행에서

그 순간을 즐기는 힘은

계획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감흥 없는 사진에 담아봤자 소용없었다.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최후통첩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시간을 낭비할 권리를 찾자!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을 담아가고 있습니다. 3월의 주제는 <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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