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싶을 때

빠르게 흘러가는 것들

by 김글향


추억은 저장되고 있는 것일까?


많이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 속에 저장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저장되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휴대폰에 들어있는 사진이 온통 아이로 가득한 날들이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얼굴이 예뻐서, 콧물이 방울방울 풍선을 만드는 것도 모른 채 울고 있는 얼굴이 귀여워서, 아장아장 기어 다니는 모습이 신비로워서, 성장하는 모습이 너무 소중해서 아이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시골 마을 담장 가득 핀 이름 모를 꽃을 바라보며, 바닷가 모래사장에 가득 담긴 반짝이는 조개를 찾으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와 함께 발걸음을 멈추고 그 순간에 머물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부터는 세상을 볼 일이 적어졌다. 바쁘다는 핑계로, 코로나라는 질병을 이유로, 계절의 변화에도 무심해졌다. 나의 휴대폰 앨범은 더 이상 아이 사진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잠들기 전 무심코 사진을 훑어보다가 아이와 최근에 찍은 사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추억을 쌓기도 전에 지나치기 바빴다


어떻게 그동안 아이와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며 바빴던 하루를 탓해본다. 우리 세상을 정지시켜 놓은 코로나도 원망해보고, 늘 그 모습 그대로인 아이와 충분히 행복한데 굳이 사진으로 담아낼 필요는 없었다는 핑계도 동원해본다. 하지만 아이의 모습으로 시선이 향할 때면 매서운 눈빛으로 숙제를 검사하고,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도록 학업을 점검하며, 학원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바빴다. 매일 보는 아이의 모습은 영상을 빨리 감듯 제대로 보지도 않고 휙휙 지나쳐버렸다.



조금만 더 천천히 느리게 재생


어느 저녁이었다. 일을 마치고 모락모락 저녁밥을 지은 후 식탁에 앉아 밥을 한술 떠넘기려던 때였다. 아빠와 대화를 나누던 아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걸 그룹의 역주행 곡을 흥얼거리며 몸을 꿀렁꿀렁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뭐하냐고 앉으라고 했지만, 아이의 엉뚱한 춤사위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휴대폰을 가져와 촬영하겠다고 붙어 선다. 순간 행복이 와락 몰려들면서 이 장면이 느리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그동안 쉬이 지나쳤던 찰나의 순간을 눈에 담으면서 다시 아이와 함께하는 사소한 일상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장난하는 모습을, 칼국수 면발을 후루룩 말아 올리며 감탄사를 내뱉는 모습을...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았을 뿐 아이의 소중한 모습들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줄곧 간직하고 싶었던 순간은 내가 고개를 들어 간직하고, 기억하고, 담아내려 할 때 선명해졌다. 너무도 당연해서 등한시했던 것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빠르게 지나쳤던 일상을 되감을 순 없으나 다시 한번 느리게 재생해본다.


“아이는 자라고 연필은 짧아져.

냄비 속 양파는 부드러워지고 손등은 쭈글쭈글 거칠어지지.

지우개는 닳아 없어지고 카펫은 낡아 희미해져.”


세상 모든 것들은 시간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을 <<시간이 흐르면>> 그림책에서 느낄 수 있었다. 촌스럽던 것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멋있던 것이 우스꽝스러워지기도 하며, 어려웠던 일이 쉬워지기도 하는...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고, 흘러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이런 시간의 법칙 속에서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과연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일까?


“하지만 어떤 친구들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변함없이 항상 곁에 있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잃는 것도 있고, 때로는 얻는 것도 있다.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도 변함없이 곁을 지켜주는 것도 있다. 얼굴에 비슷한 깊이의 주름을 머금고 옅은 미소를 띤 채 모닥불 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마음, 서로에 대한 신뢰, 깊고 단단한 우정이 진하게 전달된다. 그들의 다정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함께 느끼며,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이를 떠올려본다. 찰나의 순간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쳐 지나가 버리지만,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 속에는 각자가 남겨놓은 흔적들이 담겨있다. 그 안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들도 있다.


일상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담겨있는 우리들의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제나 빠르게 흘러가 버리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그 순간에 머무르듯 어떤 화면에서는 일시 정지해가며 때로는 아주 느리게 재생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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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 정보 <시간이 흐르면>
✍️ 이자벨 미뇨스 마르틴스 글. 마달레나 마토소 그림 / 그림책 공작소
시간은 쉬지 않고 언제나 똑딱똑딱... 흐르고 흐르고 흘러가.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을 볼 수 있어. 세상 많은 것들이 계속 변하니까. 아이는 자라고 연필은 짧아지고 감자는 싹이 나고 책은 색이 바래어져.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

✅ 함께 보면 좋은 그림책 <100세 인생 그림책>
✍️ 하이케 팔러 글. 발레리오 비달리 그림 / 사계절
발가락에 주름이 잡혔다. 이제 어른이 된 걸까? 아직은 아닌지도 몰라.
0세에서 100세까지 100장면으로 보는 인생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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