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을 때

우연히 발견한 기적

by 김글향


우연히 발견했다


까만 새벽 밤, 나무를 비추는 노란 불빛이 커튼 사이로 베어 들고 있었다. 아득했던 정신은 어느새 선명해졌고, 머릿속은 어제의 일과 오늘의 일이 뒤섞여 또랑또랑해진 시선은 천정 이곳저곳을 배외하며 산만했다. 그러다 이불을 걷어내고 주섬주섬 겉옷을 걸친 채 나는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거리, 바람에 휩쓸린 나뭇잎 소리가 들리는 유일한 시간. 오직 푸르스름한 새벽녘 빛만이 길 위를 차지하는 시간에 산책하는 것은 은근한 희열을 안겨준다. 여름날 해뜨기 전, 아직 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새벽 공기는 서늘하고 무거워서, 한낮의 가볍게 부푼 공기처럼 덥지 않았다. 새벽 5시 10분, 이슬을 머금은 바람이 내 피부를 스치며 체온을 앗아갈 때의 그 서늘함이 나는 좋았다. 집 앞에는 초록 잎사귀를 반짝이는 플라타너스와 벤치 몇 개가 놓여있는 아담한 폭포가 있고, 그 길을 따라 곧장 10분가량 위로 올라가면 자그마한 법당이 반듯하게 놓인 절이 있는데, 절을 둘러싼 산책 길 나는 그곳을 아주 좋아한다. 풍성하게 우거진 푸른 나뭇가지와 이슬을 머금은 잡초에서는 새벽 공기가 내려앉아 촉촉한 풀냄새가 났다. 한 호흡에 깊이 스민 풀 향이 내 몸 곳곳을 휘휘 돌아 내뱉는 호흡으로‘하’하고 다시 나올 때 묵은 생각과 버티는 마음이 허물어지며 쓸려 나오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 보면 내 안에 꽉 들어찬 소란스러웠던 소음도 깨끗이 비워진다. 이 소리들이 비워질 때 비로소 만물은 제 목소리를 낸다. 새벽길을 걸을 때는 그저 들려오는 소리와 다가오는 풍경을 바라보기만 해도 족하다. 그것이 온몸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인 듯하다. 아침 해가 나를 온전히 비출 수 있을 만큼의 높이로 올라왔을 때, 발걸음을 멈추고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보았다. 새벽 산책을 즐기고 있던 그때,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무언가를 우연히 발견했다. 들꽃, 이름 모를 들의 꽃! 그 꽃이 단단한 바위의 틈을 비집고 피어난 것을 보았다. 우락부락한 돌의 틈을 비집고 가녀린 생명이 피어난 것이다.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단단한 바위를 뚫고 나온 기적


들꽃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적을 경험했던 적이 있었나? 들꽃의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났던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며 점점 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표현이 서툰 사람이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자유분방하게 표출하지 못하는 성격적인 기질이 있다. 그렇게 말이나 행동으로는 속 시원하게 해소가 안 되다 보니,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겹겹이 쌓여 무거워진 감정들이 글을 쓰고 나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글쓰기에 진심인 자신을 발견하고부터 마음이 어두운 날, 마음이 즐거운 날, 마음이 그저 그런 날 모든 날을 가리지 않고 글을 썼다. 글을 쓰면 주어지는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로의 온전한 ‘몰입’이었다. 온전한 몰입을 경험하는 순간만큼은, 고정된 단단한 자아의 틈을 비집고 여리고 연약하지만 꽃을 피우려 노력하는 들꽃의 기적과도 같은 내면의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들꽃의 기적


단단한 바위를 뚫고 나온 한 송이 들꽃을 바라보며 고요한 시간에 혼자만의 글쓰기를 즐기던 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아주 작고, 너무나 사소하고, 일상과 다를 바 없지만 언젠가는 단단한 외면을 뚫고 나올 내면의 글쓰기, 그것이 세상 가득 울려 퍼지게 될 들꽃의 기적을 상상해본다.


“여기서도 민들레, 저기서도 민들레

들판 가득 피어나도 민들레는 민들레

꽃이 져도 민들레, 씨가 맺혀도 민들레

휘익 바람 불어 하늘하늘 날아가도 민들레는 민들레”


씨앗에서부터 다시 바람에 흩날리기까지 평범한 것이 주는 아름다움을 <<민들레는 민들레>> 그림책에서 느낄 수 있었다. 여기저기 피어난 민들레를 보지 못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흙먼지가 조금만 쌓인 곳이면 민들레는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꽃줄기가 쏙 올라와서 노란 꽃을 활짝 피운다. 민들레처럼 자기 존재를 강하게 주장하는 꽃도 없을 거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민들레여서 그런지 어느새 고유의 아름다움보다는 흔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꽃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들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모른다. 어디 꽃만 그런가. 초록 잎, 노란 꽃을 피워 낼 투명한 씨앗. 그 씨앗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은 마치 눈보라가 흩날리는 모습과도 같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꽃씨를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 고민과 걱정도 함께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그 모습은 신비로우면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한 번쯤은 ‘후’하고 불어봤을 꽃바람은 민들레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다.


“그래 맞아! 언제 어디서든 민들레는 민들레지. 언제 어디서든 나도 나야!”


어디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지 나는 나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딱! 민들레와 같았다. 민들레가 온몸으로 전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평범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보물찾기 같다.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는, 찾지 않아도 우연히 찾아지는 보물들은 우리 안에 숨어 있다가 어디에선가, 어느 때인가 나타난다. 세상에 보물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가진 것을 우연히 발견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내 안에 작고 여린 들꽃의 간절함이 바위같이 단단한 외면을 뚫고 나오는 순간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보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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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 정보 <민들레는 민들레>
✍️ 김장성 글. 오현경 그림 / 이야기꽃
봄마다 열리는 꽃 잔치. 저마다 수줍은 듯 야무진 얼굴로, 누가 보건 말건 제 몫의 봄빛을 피워낸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은 민들레. 흔해서 하찮게 여기는 민들레. 하지만 민들레는 그래서 더 꿋꿋하다.

✅ 함께 보면 좋은 그림책 <나를 찾아서>
✍️ 변예슬 글. 그림 / 길벗어린이
작디작은 물고기를 통해 모두에게 전달하는 잔잔한 응원과 위로! "비교하지 말고 진정한 자신을 들여다보세요. 아직은 작지만 분명 빛나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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