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날엔

[프롤로그] 이런 이야기가 필요해요

by 김글향

잠시 미뤄둔 생각들이 줄지어 몰려오는 밤이 있다.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하듯 뱉어내고 싶은 말도 많았고,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꼬여있는 생각들을 찬찬히 풀어내며 담고 싶은 글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꺼내려 들면 들수록 머릿속이 하얘졌다.


연한 회색 빛 책상 위에 빈틈없이 펼쳐진 책들 사이로 하얀색 노트를 펼쳐보았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책상 귀퉁이까지 밀려난 노트북은 아예 전원을 뽑아 바닥에 내려둔다. 그날은 왠지 탁탁탁 키보드를 두드리는 딱딱한 소리보다 사각사각 연필이 지나가는 부드러운 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 무작정 낙서한다. 연필은 보란 듯이 정해진 줄을 미끄러지듯 자유롭게 넘나들며 머릿속 생각을 쏟아낸다. 어느새 빼곡히 채워진 낙서 더미에서 불쑥 튀어나온 글자. 그것은 '지친다'였고, 지친 내 마음이었다. 딱히 대단한 걸 하고 사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지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쏟아지던 그 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책 사이로 비좁게 끼어있던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비에도 지지 않고>는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그림 에세이로 담은 것이었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대여했던 책이었고, 대수롭지 않게 읽고 덮었던 이야기였는데 오늘따라 내 마음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칭찬에도 미움에도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책에서 이 장면을 마주했을 때, 나는 아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을 잔뜩 머금고 축 늘어진 소나무와 그 속에서 간신히 몸을 웅크리고 있던 다람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은 채 바람에 나부끼던 풀숲 사이로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놓쳐버린 모자는 하늘 위로 날아가 버린 장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축 처진 소나무, 웅크린 다람쥐, 바람에 휘날리는 풀, 놓친 모자... 왠지 모르게 지금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 또한 지금 내 마음을 비추는 글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지금 내 마음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강력한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다. 마치 상처받은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듯이!


습관처럼 다른 사람과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너무 배려하느라, 정작 나 자신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며 살아온 것은 아녔을까. 아픈 마음, 지친 마음, 힘든 마음, 애쓰는 마음... 돌보고 들여다봐야 할 내 마음을 너무 당연시하며 내버려 둔 것은 아녔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은 긴 시간을 거쳐, 마침내 낙서가 아닌 글이 되었다. 나에게 너무나 다정했던 장면, 문장들을 차곡차곡 담아놓은 글. 이제는 한 권의 책으로 두 손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내 삶에 좋은 영향을 끼쳤던 그림책 속 문장들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도 닿기를

나에게 오랫동안 그래 왔듯이

당신에게도 따뜻하고 다정한 시간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오늘 당신의 마음에 필요한 이야기를 꺼내 보며

한껏 유연해진 자신과 마주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