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하루가 그리웠던 날들
아이가 어릴 때 할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공원을 자주 나갔다. 손자 앞에 있는 아버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허용과 포용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모습들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가 맞나 싶은 정도로 획기적인 변신이었다. 아이는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할아버지로부터 배웠다. 핸들을 돌리는 법, 페달을 밟는 법, 바퀴를 굴리는 법, 중심을 잡는 법. 그렇게 하나하나 세세하고 친절하게 배워나갔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집안 곳곳 켜진 불도 다시 끄고, 욕실의 변기 물도 모았다가 함께 내리고, 어지간히 추운 날이 아니고선 보일러 금지령까지 선포하시며 그렇게도 쪼아 붙이시던 지독한 구두쇠였는데, 손자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부자 할아버지로 말만 꺼내면 지갑에 들어있던 돈이 펑펑 쏟아졌다. “할아버지, 나 자전거 사줘. 자전거 타고 싶어.” 손자의 말 한마디에 할아버지의 지갑은 또 속 시원하게 열렸다. 그때 당시 또래 친구들보다 고가의 자전거를 타며 어깨를 으쓱였던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 후에도 아이는 꽤 오랫동안 자전거를 탔다. 이제는 너무 커버려서 도저히 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얼마 전에 자전거는 두 번째 주인에게 건네 졌다. 아이에겐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나에게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던 소중한 자전거였는데, 자전거와 함께 추억까지 팔아버린 것만 같은 서글픔이 몰려왔다. 자전거는 또 다른 추억을 가득 실은 채 힘차게 달리겠지. 추억은 내 마음속에 소중히 묻어두기로 한다.
자전거를 정리하던 날, 꺼내기 힘든 순간의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12월의 어느 날. 너무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며 나는 충격에 휩싸였었다.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뚝뚝한 딸이었던 나는, 퇴직하고 난 후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남들처럼 퇴직 기념 파티는 고사하고 그동안 고생하셨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는데, 그 벌로 지금까지도 텔레비전에서 누군가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아버지와 관련된 언급을 하는 것을 가볍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지리산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꿈은 그렇게 허공 속 연기처럼 맥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마음. 아픔과 슬픔을 정통으로 맞닥뜨리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은 나의 오늘이 어제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보통의 하루를 살아가고 싶은데, 달라지는 삶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왔고, 그럴수록 보통의 하루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리움, 울적함, 상처를 모조리 꺼내어 노트에 끄적이던 날들이 계속되었고 글을 쓰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강렬한 물음표가 생겨났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인데, 그동안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인지? 앞으로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와 내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깜깜한 어둠이 있어야 반짝이는 별들을 볼 수 있듯이 그렇게 깊고 어두운 슬픔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써 내가 꿈꾸는 세상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꼬마였던 시절이 있다. 꼬마 아이였던 우리들은 각자 다른 세상을 살아가며 어른이 되었고, 꼬마의 세상은 우리들의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 아이들은 늘 해맑을 것이라는 어른들의 착각, 어른이 되어 돌아보면 모두 아름다운 추억만 있을 거라는 포장을 풀어헤치고 꼬마에게 존재하는 어둠을 들여다보았다. <<소년의 마음>> 그림책 속에는 작고 귀여운 꼬마 아이가 있다. 표지의 가운데에는 네모반듯하게 구멍이 뚫려있고, 제목 그대로 소년의 마음을 열듯 표지를 넘겨보게 된다. 그리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함, 재미있고 귀엽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어둡고 쓸쓸했던 소년의 마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존재하는 꼬마 아이도 만나보게 된다. 무의식에 꼭꼭 숨겨두었던 꼬마의 마음을 조심스레 열어본다면,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작고 귀여운 소년은 깜깜한 밤 물고기를 그리고 바다를 그리며 그림 속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상상의 세계에서 덩그러니 바다를 구경하다가 갑자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소년)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말해주세요.
(소년) 음... 할... 머... 니?
(전화기 너머) 할머니를 연결해드리겠습니다.
멀리서 할머니가 수영하며 다가오고, 소년은 그렇게 돌아가신 할머니와 재회한다. 그리웠던 할머니 품에 폭 안겨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잔뜩 쏟아낸다. 말을 말처럼, 새를 새처럼 잘 그렸다는 할머니의 말이 너무나도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우울한 소년의 마음을 온전한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소년의 가엾은 마음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는 네 눈썹 사이에 있어.
내가 제일 귀여워했던 콧구멍 속에 있고,
매일매일 쓰다듬던 네 머리카락에 있고,
간질간질 간질이던 겨드랑이 사이에 있고,
뽀뽀 쪽 하던 네 두 볼에 있어.
네가 매일매일 할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매일매일 네 옆에 있어.”
길을 가다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흰머리 아저씨를 볼 때면, 공원에서 손을 잡고 지나가는 할아버지와 손자를 볼 때면, 누군가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여지없이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다가도 불쑥불쑥 생각이 난다. 나에게도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말해보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를 말할 것이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시겠지. 이별이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작별 인사를 나누진 못했지만, 아버지는 지금도 나에게 말하고 있다. 예쁜 우리 딸 멋진 인생 살다가 다시 만나자고, 네가 원하는 인생 마음껏 살다가 오라고... 그렇게 나에게 햇살로, 바람으로, 공기로,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
✅ 그림책 정보 <소년의 마음>
✍️ 소복이 글. 그림 / 사계절
깜깜한 밤이 찾아오면 소년은 다시 무서움에 빠진다. 새를 아무리 그려도 밤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밤은 죽음과 닮았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밤과 죽음은 그림으로도 어찌할 수없을 만큼 무서운 존재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가 갑자기 죽은 것처럼, 소년은 다른 가족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버릴까 봐 두렵다. 그런 소년 앞에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물고기를 그렸더니 거실이 온통 바닷물로 차오르는 것이다. 소년은 책상을 배 삼아 창문 밖 세상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소년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머니를 만난다.
✅ 함께 보면 좋은 그림책 <나는 죽음이에요>
✍️ 엘리자베스 헬란 라슨 글, 마린 슈나이더 그림 / 마루벌
오늘 '죽음'이 당신을 찾아온다면, 어떤가? 두려운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한가?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면, 그 대상이 반드시 나쁜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죽음 역시 나쁜 것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죽음은 나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거부할 수도, 숨을 수도 없다. 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피하고만 싶은 존재 죽음이 오늘, 자신에 대한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