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주인을 찾아서
아이가 어릴 때 할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공원을 자주 나갔다. 손자 앞에 있는 아버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허용과 포용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모습들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획기적인 변신이었다.
아이는 자전거 타는 방법을 할아버지로부터 배웠다. 핸들을 돌리는 법, 페달을 밟는 법, 바퀴를 굴리는 법, 중심을 잡는 법 등. 그렇게 하나하나 세세하게 친절하게 안정감 있게 배워나갔다.
나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었던 구두쇠 아버지로 집안 곳곳 켜진 불도 다시 끄고 욕실의 변기 물도 모았다가 함께 내리며, 어지간히 추운 날이 아니고선 보일러 금지령을 선포하셨던 아버지. 그렇게도 쪼아 붙이시던 지독한 구두쇠 양반이었는데, 손자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었던 부자 할아버지로 말만 꺼내면 지갑에 들어있던 돈이 펑펑 쏟아졌다. 메이커 옷가게를 가도 펑펑, 비싼 운동화를 봐도 펑펑. 그렇게도 속 시원하게 돈을 쓰는 모습들이 마냥 신비로웠다.
나에게는 지독한 구두쇠 아버지가
손자에게는 세상 쿨한 부자 할아버지로
철저하게 이중 노선을 탔다.
"할아버지, 나 자전거 사줘. 자전거 타고 싶어."
손자의 말 한마디에 할아버지의 지갑은 또 속 시원하게 열렸다. 그때 당시 또래 친구들에 비해 고가의 자전거를 타며 어깨를 으쓱거렸던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가 다른 세상으로 건너 간 후에도 아이는 꽤 오랫동안 자전거를 탔다. 이제는 아이가 너무 커버려서 도저히 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다가 어제 당근 마켓에 올렸다. 자전거에 담겨있는 추억들을 꼭꼭 묶어두었다가, 두 번째 주인을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편과 상의 끝에 저렴하게 팔기로 했다.
늦은 오후 날씨는 잔뜩 흐리고 괜스레 마음도 울적하여, 장도 보고 바람도 쐴 겸 채비를 하고 집 밖을 나섰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남편의 폰으로 알림이 온다. 계속 온다. 자전거는 올리자마자 여기저기서 문의가 왔고, 결국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왔다. 주차장에서 두 번째 주인을 기다리며 자전거를 세워두었고, 시간이 소요되자 그냥 기다리기 그래서 자전거를 한번 타보았다. 아이용이라 어른이 타면 모양새가 웃기지만 마지막 인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물티슈로 슥슥 닦아도 보고, 찰칵찰칵 사진도 찍어보다가 또 울컥한다. 이럴 땐 나의 감수성에 내가 당황스럽다. 남편이 볼까 봐 서둘러 몸을 돌려 차 안으로 들어갔고, 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차 안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잠시 후 할아버지 한 분이 자전거 가까이로 다가오신다.
'아... 우리 아버지처럼 손자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보셨구나. 이런 우연이..' 할아버지는 손자를 떠올리는지 구석구석 꼼탁스럽게도 살펴보신다. 남편이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한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가 오간다.
"안녕하세요? 자전거 보러 오셨지요?"
"아, 맞아요. 이건가?"
"예, (자전거 탈) 아이가 몇 살 정도 되었나요?"
"아. 그게 아니고, 내가 탈라꼬"
"예??"
"내가 탈라꼬. 보러 왔지요."
"아, 이건 아이용이라 어르신이 타시기엔 위험하실 텐데요..."
"아, 그르지요. 직접 보니 그렇네."
폰 사용이 서툰 할아버지여서 올려진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시지 못한 채 가까이 계셔서 와보신 듯했다.
그렇다. 할아버지들은 손자에게 중고보단 새자전거를 사주고 싶으시겠지. 그리고 본인은 저렴한 자전거를 구매하고자 힘든 발걸음을 하신 거다. 이런저런 생각에 더 마음이 짠했다. 탈 수 있는 거였다면 그냥 드리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의 안전을 생각하여 아쉽지만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또 알림이 울렸고, 자전거는 드디어 두 번째 주인공(야무진 아버지)에게 건네 졌다.
자전거와 함께 추억을 팔아버렸다
아이에겐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나에게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던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자전거
자전거와 함께 추억을 팔아버렸다
추억으로 꽁꽁 묶어둔 채
멀뚱히 세워놓기엔
자전거로써의 삶이 아까웠다
바람을 맞으며 바퀴를 굴리며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을 가득 싣고서
세상을 달려야 할 자전거인데
꽁꽁 묶어둘 수가 없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 방치하기엔
자전거는 아직 쓸모가 많았다
그래서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
두 번째 주인을 잘 만났고
또 다른 추억을 가득 실은 채
힘차게 달리기를 바랄 뿐이다.
추억은 내 마음속에 소중히 묻어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