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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노우라 Feb 15. 2018

휴학제안서

10월



걔 요즘 왜 학교 안 나오냐?”
휴학했대.”

간단명료한 대답뭔가 사정이 있을 줄 알았는데 휴학이라니의외였다하지만 그 아이와 술자리에서 나눴던 말을 되짚어보면 이전 휴학 때 했던 것들을 말하길 좋아했었다아니우리가 말하길 강요했나하는 생각도 들었다분위기가 다들 오랜만에 만난 자리라그동안 뭐 하고 지냈냐면서 떠들썩했었다그런 와중에 휴학은 술안주 삼기에 참 좋은 단어였다다들 술기운이 올라 있는 상태에서 휴학 이야기가 나오면 잘 했네못 했네멋지다좋겠다는 말을 연발했었다그런데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작 애들이 휴학 때 어떤 걸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음 학기에 휴학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그 아이의 휴학 소식이 더 궁금했다.

휴학하고 뭐한대?”
나야 모르지.”

동방 구석에 누워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휴학할 이유가 딱히 없을 텐데.”
아니존나 많지.”

친구는 친히 손가락을 접어가며 말했다.

군대집안 사정여행아니면 충동적이고 전략적인 거수강신청 좆망났거나 중간고사 망했을 때 매우 신속하게 결정해줘야지학교에서 사고 쳐서 매우 쪽팔린 상태거나 과CC 깨졌을 때아니면 공무원 준비나 취업하려고.”

나는 솔직히 감탄해서 말했다.

새끼대단하네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척 보면 알지주변에 그런 애들 천진데.”
그럼 넌 휴학해본 적 없는 거야?”
안 했어하고 싶긴 한데할 이유가 없다.”
뭔 소리야 그게.”
못 알아들었으면 말고근데 너야말로 휴학한다고 하지 않았냐?”
내가 그랬었나?”
그냥 하는 소리지습관처럼.”

습관처럼무서운 말이었다군 전역을 하고 복학을 한 다음 1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어색할 것만 같았던 학교생활은 금방 익숙해지긴 했다그런데 마음속에 남은 이 찜찜함은 무엇인지불안했다이제 내년이면 3학년이다또 1년이 흐르면 4학년이 되는데취준을 하던대학원을 가던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다난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학교에서 남은 2년 남짓한 기간에 과연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싶었다그러나 휴학은 이 모든 간절한 물음에 대한 답일 수가 있을까도박 같았다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휴학 끝에 나는 어떤 답을 가지고 학교로 돌아올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동요한 마음을 숨기려 애썼다.

그래휴학하면 진짜 좋겠다.”
  
  
  

11월




기말고사 공부를 하다 충동적으로 카카오톡을 켰다지난달 갑작스럽게 휴학을 했던 그 아이의 카카오톡 프로필이 어쩌다 눈에 띄었다동그란 프로필 사진 옆에 빨간 점이 있었다터치해 확인해보니 해외여행 중에 찍었는지 배경으로 거대한 유적지가 펼쳐져 있고선글라스를 낀 채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그 프로필 사진이 예전에 갔던 여행인지 현재 진행형인 여행 사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상태 메시지는 처음처럼’ 이었다뭘 처음처럼 하고 싶은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아이는 나보다는 행복하지 않을까하며 도서관에 박혀있는 나의 신세를 한탄할 찰나 옆에서 누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스마트폰 잠금 버튼을 눌렀다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궁금하면 메시지를 보내라인마.”

선배였다.

잠시 쉬러 나와서 선배랑 두런두런 시험 이야기를 했다오늘 몇 시까지 공부할 예정이다공부 너무 힘들다이 과목 개쓰레기 아니냐자살하고 싶다 등 암울한 이야기가 자판기 커피와 함께 목구멍에서 흐르듯 자연스럽게 선배에게 물었다휴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휴학하고 싶어잘 생각해그 기간에 뭐 할 건지 미리 계획을 다 짜고 하라고무턱대고 놀고 싶다쉬고 싶다고 했다간 나중에 후회할 거야.”

아차싶었다선배의 일장연설이 이어질 것 같아 얼른 대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이제 곧 졸업하는 선배에게는 민감한 주제였을 것이다나는 이제 2학년이 끝나가고 있어서전공은 어느 정도 친숙해졌지만시험공부를 하면 가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취업은 적어도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또 달랐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아니 넌 이미 늦었다.’ 등등… 나는 언제부터 불안해야 하는 건가미래를 얼마나 걱정해야 하는 건가생각할 때쯤 연설이 끝나가고 있었다

면접 때 다 설명해야 해그때 뭘 했는지그럴듯하게 포장해야 한다고근데 그때 놀기만 했으면어휴.”

나는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하다고적당히 얼버무리고 다시 공부하러 들어가자고 했다그러자 선배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며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했다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렇게 궁금하면 메시지를 보내라, 인마.”


선배의 말이 떠올라 열람실로 돌아가는 길에 스마트폰을 꺼내 잠금을 풀었다아까 보고 있던 그 아이의 프로필 사진이 나왔다사진을 보면 해외인데여행이 아니라 봉사 활동을 갔을 수도 있다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기업이 지원하는 해외 봉사 활동봉사하면서 대기업의 복지에 감탄하고거기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그 기업의 서류 지원 전형을 면제해주는 혜택까지설마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던 중누가 손을 툭 치고손가락이 미끄러져 사진 상단에 1/32라고 되어 있던 것이 2/32로 바뀌었다

다른 여행 사진 같았다그 아이 본인은 나오지 않고북적이는 유럽 도시의 밤 풍경을 찍은 사진이었다.
남이 숨겨놓은 돈을 찾은 것처럼은밀하고 빠르게 사진을 밀어 넘겼다.
3/32, ‘SAVIOR CLASS 00기 해단식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3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똑같은 초록색 조끼를 입고 활짝 웃은 채 찍은 사진
6/32○○기업 인턴 수료증을 손에 쥐고 찍은 셀카.
9/32, ‘○○○분야 통합학술대회라고 적혀있는 현수막 아래 수백 명의 사람이 앉아 있는 강당에서 그 아이가 발표하고 있는 모습
11/32황량한 벌판 위에 세워진 천막 아래 유니폼을 입고 흑인 아이들과 찍은 사진
12/32밝은색의 원피스를 입은 그 아이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카페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놓고 맞은편의 사람이 찍어준 사진.
열람실 문 앞에 도착했다나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주머니 속에서 잠금 버튼을 꾹 눌렀다.
  
  
  

12월




휴학을 하고 싶다고?”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기말고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나는 나지막이 네하고 대답했다.

재밌다 하지 않았니전공 공부.”
그렇죠.”
근데 왜 휴학을 해흐름 안 끊기게 계속 쭉 하지.”
.”

그냥 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려다 말았다어머니에게는 내가 휴학하는 합당한 이유가 필요해 보였다.

혹시 쉬고 싶니?”
아니 그건 아니고.”

쉬고 싶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어떻게 반응할까그게 두려웠다중간고사-과제-기말고사의 반복이 지겹고 멈춰보고 싶다고 말한다면 또 어떨까나는 어서 독립해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그만큼 무서웠다.

휴학 때 계획은?”
… 여러 가지.”

어머니는 앞을 바라보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었다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조금 전에 내가 대답한 바로는 나는 쉬려고 휴학하는 게 아니었다이제까지 만났던 휴학을 경험했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대외활동이랑… 봉사 활동이랑… 잘 되면 인턴도.”
종이에 상세히 적어서 보여 다오.”

아버지가 말을 끊었다.
내가 한 면을 빼곡히 채운 A4 용지를 아버지에게 보여준 건 꼬박 1시간 뒤였다.

이걸 다 할 수 있겠니?”

나는 최대한 하도록 노력해야죠라고 대답했다.

아들아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뭐냐?”
?”
이걸 보면 인턴공모전봉사 활동여행아르바이트적을 수 있는 건 다 적은 것 같은데일관성이 없어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구나.”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요

일단이것저것 해보고 알아봐야겠죠.”

나는 얼버무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학교를 계속 다니다가 휴학을 생각하게 될 수도 있어그런데 정말로 하게 된다면이런 걸 다 하면 어떻게 되는데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버지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자상하고따뜻한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아들아휴학왜 하고 싶다고 했었지?”


휴학하면 진짜 좋겠다.


머리가 울렸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종이를 던지듯 놓았다불이 꺼진 방 안은 왠지 모르게 포근하고 편안했다침대에 누워 습관적으로 카톡을 켰다손가락으로 친구 목록을 드래그하면서 쭉 훑었다그 아이의 프로필 사진 왼쪽 위에 빨간색 점이 생겨있었다사진은 저번과 달랐다얼핏 봤을 때 무슨 사진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 아이는 답을 찾고 있을까아니면 벌써 찾았을까?’

나는 그걸 터치하려다가 멈췄다.

상관없어.’

손가락을 움직여 그 아이의 이름을 왼쪽으로 밀었다그 아이의 이름 오른쪽 끝에 네모나게 회색과 빨간색의 숨김/차단 버튼이 생겼다손가락을 움직여 숨김을 눌렀다나는 잠금 버튼을 눌러 화면을 껐다스마트폰을 놓고 한참 천장을 바라보다가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섰다종이를 펼쳐 뒷면이 위를 보도록 놓았다손을 뻗어 책상 등을 켰다아무것도 적지 않은 새하얀 종이가 어둠 속에 홀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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