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싫은데 너무 짠해

<디어 마이 프렌즈> 리뷰

by 블블


드라마 작가 누구 좋아하냐고 묻는 질문에 선뜻 노희경이라고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처음 보는 사람이거나, 굳이 나를 알려야 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노희경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얻게 되는 이미지들을 미리 떠올렸기 때문이다 . 마이너한 감성과 우울함. 쓸데없는 진지함을 동경하는 어떤 어두운 인간으로 보일까 봐. (뭐 사실이기도 해서 더 자기 검열했는지도) 그래서 가능하면 나를 좀 더 가릴 수 있는 작가들을 말했던 것 같다. 덕후들이 덕밍 아웃하지 않는 이유가 이런 것일까.




엄마의 정년퇴임 이후로 엄마와 꽤 친해졌다. 엄마가 어디 간다고 하면 “어디가?” “누구랑?” “언제?” 이런 것들에 대해 시시콜콜히 물어보는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엄마가 어릴 때 나에게 물어보던 모든 것들을 이제 내가 엄마에게 묻는다. 괜히 집에 들어가기 전에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엄마의 위치나 동선을 파악하고, 시간이 맞으면 밖에서 산책도 하고, 밥도 사 먹고. 뭐 그런. 정말 대학 때 동기들이랑 하던 짓을 엄마랑 요즘 많이 했다. 중학교 때 이후로는 엄마와 뭘 하지 않았던 아이였는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던 딸이었는데. 백수생활이 요즘 엄마를 내 베프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다 보면 엄마가 가끔씩 생각지도 못했던 말들을 해줄 때가 있다. 아빠가 엄마 자취방에 와서 창문에 돌멩이를 던진 얘기라든가. (기껏 나가보면 아빠는 “불 끄고 주무시라구요” 라는 대사를 쳤다고 한다. 소오름) 어릴 때 자신의 동네에 감나무가 얼마나 많았는지. 이모들마다 맛있는 과자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했는지. (막내 이모는 그 자리에서 다 먹고, 넷째 이모는 숨겨두고, 셋째 이모는 잘 놔뒀다가 다른 이모가 먹고 싶어 하면 꺼내와서 줬다고 했다) 어쩌다 엄마 배에는 그렇게 큰 흉터가 생겼는지. 사실은 외삼촌 위로 남동생이 한 명 더 있었다는 얘기까지. 엄마는 그저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오며 가며 나한테 하는 것일 텐데, 그럴 때마다 난 엄마가 남 같아서 너무 좋다.



내가 엄마를 충분히 알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들. 엄마는 정말 남이었구나. 엄마를 몰랐구나 하는 생각들이 모여 환기구를 만들고, 엄마와 나 사이에 신선한 공기가 채워진다. 엄마는 내 인생 통틀어 내 곁에 있던 사람이긴 하지만, 엄마 인생 통틀어 내가 엄마 곁에 있었던 건 아니니까. 나는 당연히 엄마를 잘 모른다. 그 무지가, 그 무지의 각성이 나를 긴장하게 하고, 엄마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게 한다. 엄마를 아름다운 한 명의 인간으로 보이게 한다.





<디어 마이 프렌즈>도 그랬다. 작가는 계속 마누라를, 딸을, 엄마를, 연인을 남같이 느껴지는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석균(신구 분)이다. 나에겐 2016 가장 문제적 인물이었다. 어떻게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던 인물. 무례함이 도를 지나치고 자신의 생각만이 항상 정답인 전형적인 진상 어른. 어느 날 그가 종 부리듯 부리던 마누라가 사라졌다. 석균의 첫째 딸 이름인 순영이로 불리던 석균의 부인 정아(나문희 분). 석균은 이제 “순영아”란 호명에 대답하지 않는 낯선 정아를 만나게 된다. 남 같은 정아와의 대면. 이혼 서류를 내미는 정아.



석균은 그제야 변하기 시작한다. 근 60년 만에 신행 장소에 다시 가 본 석균은 거기서 하루를 보낸다. 하루를 보내며 젊은 날의 정아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다. 몰랐다는 말이 변명으로 쓰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아온 석균은 소설을 준비하는 완이(고현정 분)에게 이 모든 일을 고백하고, 생전 처음 부엌에서 밥을 해 먹는다. 정아에게 전화를 걸어 살림하는 법을 묻기 시작한다.


29년 열혈 한국 드라마 시청자 입장에서 이런 캐릭터는 처음이었다. 이런 문제적 애증남이라니.

너무 싫은데 너무 짠했다. 너무 짠해서 너무 싫어하기만 할 수가 없었다.


이 작가는 무시무시하게도 석균에게만 정아를 남처럼 보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시청자 역시 석균을 남처럼 보도록 만들었다. 내가 원래 잘 아는 혐오스러운 꼰대나 아재의 모습에서 떨어뜨려 따스한 시선으로 석균의 삶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브라운관 안 등장인물에게도, 브라운관 밖 시청자에게도 익숙한 인물을 낯설게 보이게끔 ‘남처럼 보기’ 연습을 시킨 것이다. 내가 몰랐던 엄마를 발견하며 남 같아서 좋았던 것처럼, 석균의 삶을 담은 이야기를 통해 ‘남’처럼 그를 보았다. 남처럼 대하니까 그 역겹던 인간이 짠한 사람으로 보였다. 일방적인 혐오의 감정으로 속단하지 않게 되었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는 이런 의식들이 계속해서 진행된다. 난희(고두심 분)와 완이의 모녀관계에서도 자신이 알던 엄마, 자신이 알던 딸에서 이탈시켜 서로를 낯설게 만든다. 그 이후 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엄마들이 자신의 딸을 이해하게 만들고, 딸 시청자들에게는 난희와 희자(김혜자 분), 정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엄마를 이해하게 만들었다. 영원과 난희, 정아와 희자 사이의 우정도 다른 수순을 밟지는 않는다. 완이와 연하(조인성 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연하가 휠체어를 탄 낯선 모습이 되었을 때,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장애인 남친 버리고 온 년'이라는 자책감을 완이는 우리에게 진솔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더 이상 질책하지 않고 공감한다.



낯익음과 낯섦 그 어딘가에서 삐져나오는 찐득찐득한 감정들. 온전히 미워할 수도 없고, 온전히 좋아할 수도 없는. 양가적인 감정 속에 질척이는 6-70대를 바라보며 위로받았다. 엄마와 계속해서 베프이고 싶었고, 함께 여행에 가고 싶어 졌다. 이해할 수 없는 아빠의 삶도 상상해보려고 했다. 자식이란 늘 염치가 없어서 역시 이해에는 실패했지만.


내가 믿고 있던 드라마의 힘을 오랜만에 체험했다. 온몸이 짜릿짜릿해서 아플 정도로. 온전히 공감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혀 이해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을 순식간에 짠해지도록 만드는 필력에 다시 한번 반했다. 다음에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누군가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조금 망설이는 척하다가 노희경이라고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이너 한 감성이면 어떠랴. 이렇게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은데. 그 애매함이 진짜 ‘진짜’ 같아서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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