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의심했다. 너의 칭찬.

'이깟 칭찬쯤' 능숙하게 받아들이기로 해.

by 블블



‘능숙함 VS 서투름’의 대결이라면, 이상하게 나는 항상 후자에 끌렸다. 뭘 능숙히 잘 해내는 사람보다 어딘가 모자라고 서투른 사람에게 마음이 갔다. 거의 결핍성애자 수준인데, 이 이끌림은 특히 감정을 표현할 때 서투른 사람에게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전달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고 싶은 행동이 있는데- 사실 어떻게 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호감이 가는 것이다. 그 서투름은 진정이기에. 떨리지 않는다면 서투르지도 않을 테니.


분명 이런 성향은 나 자신이 ‘바로 그런’ 지점에서 많이 서투르기 때문에 강화됐을 것이다. 특히 내 서투름은 칭찬받을 때 극적으로 드러나는데, 어려서부터 정말이지 칭찬을 참 잘 못 ‘받았다’.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진짜 아니다), 칭찬을 해 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걸 잘 몰랐다. 더 이상의 칭찬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칭찬을 거부하며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하하. 그럴 리가.’ 겸양의 미덕을 착실히 잘 습득했거니와 더불어 누군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법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째서 나에게 호의를 베푸시나요. 내가 뭘 했다고. 칭찬이라고 해줬는데 매번 이런 까칠한 반응이니 결과적으론 칭찬을 많이 못 받은 게 사실일 수도 있겠다. 진짜인가 의심받는 칭찬을 하는 누군들 유쾌했을까.




어제는 윤종신 공연을 다녀왔다. 190만 명이 집결한 광화문을 뒤로하고, 이대역으로 향했다. 공연 내내 자꾸 귀에서 빠져버리는 인이어를 매만지면서, 또 때로는 보면대 위에 놓인 종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윤종신은 말을 이어나갔다. 영화 <미라클 벨리에>를 보고 언젠가 당차게 떠나갈 두 딸을 생각하며 ‘사라진 소녀’를 작사했던 과정. 영화 <버드맨>을 보고 한창때가 지난 연예인의 마음을 담아 노래 ‘버드맨’을 만들게 된 과정. 그는 그때 자신이 느꼈던 생각의 파편들을 한 조각씩 주워 스스럼없이 보여주었다. 몇몇 곡을 들을 때는 울컥했는데, 여기서는 부끄러워 말하지 못할 것 같다.


창작의 결과물‘만’을 보고 평하는 건 참 쉽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재는 굳이 안 보여도 되는 창작의 과정을 우리 앞에 펼쳐놓았다. 과정을 공유하는 건 아티스트로서도, 관객의 입장에서도 낯선 경험일 텐데, 그는 오롯이 무대 위에 홀로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작사가 윤종신이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이 노래를 만들 때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자신이 걸었던 고민의 길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여놓았다. 그가 애써 노래를 통해 나누고 싶었던 건, 그냥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삶. 생각의 단편들이었다. ‘나 이렇게 살고 있어요’ ‘나 이런 사람이에요. 싫어도 어쩔 수 없죠. 이게 나인데.’


그에게도 자연스럽게 음악 앞에 ‘삶’이 놓인 순간이 있었으리라. 고결한 음악적 이상 혹은 상업적 성공이 아니라 그의 삶을 표현하는 도구로써 음악이 온전히 사용되던 순간. 그때 그는 자기 자신이 되었다. 그 굴곡을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녹여내어 진솔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한 ‘사람’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공연 내내 그의 삶을 담은 노래들이 계속해서 불러졌다.


솔직한 얘기는 아무래도 써지지 않는 나를 닦달하고. 이런 편협하고 옹졸한 마음속에 갇혀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을까. 글 앞에 내 삶을 내려놓는 일조차 하지 못하면서 나는 무엇을 전달하고파 그리 애를 썼던 것일까. 그런 이야기들이 공감을 얻을 수는 있을까. 한참 서투르고 모자란 내가 여기까지 생각을 풀어놓았을 때 이미 종신 아재는 무대 위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느꼈다. 아. 이런 능숙함이라면. 좋다. 참. 좋다. 참 세련되게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구나. 20년 동안 음악을 만들고 이야기를 써내려 온 사람의 능숙함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능숙한 건 거짓이 아니다. 솔직한 자신을 ‘세련되게’ 혹은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진정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서투름을 향한 나의 편애에서 이제 벗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요즘은 늘 그렇듯이 다 엉망이었다. 며칠 전에는 몇 천대 일의 경쟁률이 7:1 정도로 줄어들어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또 그 출발선상의 몇천 명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고, 기껏 필기까지 다 본 대학원 시험의 구술시험 날짜를 까먹어 가지 못했다. (아직도 꿈같다. 너무나 평화로웠던 그 날 아침. 갑자기 느껴지는 뒷목의 쎄함. 세상에)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엉망진창인 한 해를 보냈는데, 이상하게 이번엔 작년만큼 재작년만큼 많이 울지도, 많이 속상하지도 않았다. 거꾸로 많이 웃었다. 물론 허탈함이 웃음의 절반이었지만. 읽던 중인 해리포터 시리즈를 꾸준히 읽어내고, 여전히 주변 사람들의 어제오늘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 엉망진창인 소식들을 그들에게 전하면서도 먼저 웃을 수 있었다.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쓰린 마음이 쓰리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윤종신의 공연을 보며 깨달았는데, 그건 아마 나에 대한 칭찬을 조금은 더 ‘능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 아니라는데 자꾸 왜 그러세요?”라는 서투른 칭찬 대응에서 벗어나 이번엔 그대들의 위로와 칭찬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잘 하고 있다’ ‘나는 널 믿고 있다’는 지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칭찬을 받는 일에도 능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때와 달리 그 모든 말들이 위안이 되었다. ‘글을 잘 쓴다’는 말도, ‘언젠가 너의 날이 올 거야’라는 말도, ‘너는 넘칠 정도로 뛰어나니까’, ‘언니는 이미 충분하니까’라는 말이 그 무게감을 그대로 안고 나에게로 날아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칭찬 혹은 위로를 온전히 받아들인 경험이었기에. 칭찬은 무언가를 증명해냈을 때 받는 게 아니었다. 그 말 자체로 진실이냐 아니냐도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아닌데 왜 자꾸 저런 낯부끄러운 말을 하지’란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말은 진실이 되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그 정도로 괜찮은 나라면 지금 당장 결과를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 조금. 아주 쪼오금. 능숙해졌다. 칭찬받는 법에. 위로받는 법에.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을 향해 싱긋 웃으며 F**k you를 날리는 법에.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으니, 언젠가 의심하지 않고 써 내려갈 수도 있기를. 그럴 날이 오기를. 떨리지만 능숙하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나도 진심이지만 세련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되겠지.


아-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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