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건.., 가면.

영화 <너의 이름은> 리뷰를 가장한 고백.

by 블블

마지막으로 절박했던 적이 언제였을까. 자신의 몸을 하고 있을 미츠하를 만나기 위해 산속으로 질주하는 타키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떤 상황이 와야 나는 저렇게 절박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혜성이 하늘을 수놓지도 않고, 미츠하와 타키가 서로 마주하는 황혼녘도 아니지만. 어쩐지 나는 미츠하의 몸을 하고 미츠하를 만나러 가는 타키의 절박함이 이 영화의 전부로 기억 남는다.


타키를 보며 요 근래 절박하기를 포기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취업준비를 할 때에도 그리 절박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면접 연습을 거치며 제일 많이 들었던 말도 그것이었다. “좀.... 절박해 보이지가 않아요” “좀 촌스러워 보여도 될 것 같은데. 이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열정적으로 보이면 좋을 것 같아. 그게 좀 촌스럽게 느껴져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 같아”라는 코멘트를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 줄 순 없는 걸까 고집을 피웠기에. 나를 바꿔가며 붙어야 하는 회사라면 들어가서도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했기에. 결국 면접장에서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러니 아마 면접관들 눈에도 난 정말 절박하지 않아 보였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취급해주셔도 기꺼이 가고 싶다 말 못 하는 나라서. 당신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실은 이만큼이나 이 일을 하고 싶다 표현 못하는 나라서. 이런 소박한 진심으로는 당신들 눈에 들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아버려서. 대중의 흥미를 끌어야 하는 직무의 지원자가 그런 모습이었으니 결국 항상 떨어졌던 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박하다는 건 나에게 ‘절벽 끝에 겨우 매달려 버티고 있는 두 손’을 떠올리게 만든다. '끝이다!' '다음은 없다!' 뒷일은 지금 알 바 아니게 될 때. 지금 이 순간만이 내 삶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때. 그럴 때 절박함이 튀어나온다. “이판사판이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야.”의 느낌적인 느낌이라고나 해야 할까. 취준계에서 풍문처럼 떠도는, 면접장에서 울었다는 사람이 결국 합격했다는 이야기 역시 ‘절박함’의 정서가 작용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소박한 진심으로 승부를 보려는 내 태도는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절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절박해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겨우 매달려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비참해서. 스스로 가면을 벗지 않아도 누군가 내 민낯을 알아봐 주지 않을까 매번 어쩌면 하는 마음을 안고 기대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대실패였다.


매번 이곳이 끝이라는 절박함을 담지 못한 채 다음을 생각하던 나에게는, 계절은커녕 어느 하루조차 맞는 날씨가 없었다. 끝내 대놓고 절박할 수 없었다. 나를 가리고 꾸민 채로 절박함의 정서를 잃어가던 나는 타키를 보면서 나의 '소박한 진심' 역시 '가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저 여기가 끝임을, 다음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거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모든 것이 끝이야. 다시는 미츠하를 볼 수 없어’

이 촌스럽고 진부한 타키의 열정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어제는 작가교육원에서 내가 쓴 드라마 대본으로 합평을 받는 날이었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쓴 대본이었고, 때문에 여기저기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이것이 최선이기에 코멘트 한 마디 한 마디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나에게 선생님이 던진 첫 코멘트는 “왜 그렇게 대본에 감정을 아껴 써?”였다.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처음 막혔던 문으로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사람마다 각각 삶에서 만나는 벽이 다를 것이다. 20대 중후반과 30대 초입의 나에게는 이 장애물이 가장 넘기 힘든 커다란 벽이란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아끼지 않는 법. 뒷일 따윈 생각하지 않고 지금 외치는 일. 그게 아무리 촌스럽고 비참해 보여도.


가면과 민낯. 자기표현과 자기검열 사이에서 나는 계속 넘어지고 있었다. 내 사랑도 사랑이에요.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좀 알아주시면 안 되나요. 앞선 면접들에서 넘지 못하고 돌아 돌아왔는데, 나는 또 여전히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채로 지금 여기서 혼자만 ‘소박한 진심’이라 믿는 ‘고집’을 버리지 못한 채 떼를 쓰고 있었다. 결국은 진심을 드러내는 일에 겁이 난 것뿐이면서.


팔짱을 끼고 있는 나. 카페에 앉아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구경하고 있는 나. 손가락을 움직여 타자기를 두드리지 않고, 우산을 구할 생각도, 비를 맞고 걸어나갈 생각도 없이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나. 지금의 나는 어떤 일에 민낯을 내 보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 관성이 되어가는 나에게 타키와 같은 ‘절박함’이 다시 피어오를 양분이 있을까.



자신의 이름 대신 다이스키(좋아해)란 마음을 적은 타키. 내 이름 따위 기억하지 못해도 당신에게 ‘좋아한다’는 감정을 아끼지 않는 일이 중요했을 거다. 타키의 이름이 가면이었다면, 좋아해란 말은 민낯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조금 오글거렸지만, 나에게는 그 장면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물론 개인의 생존을 담보로 두는 절박한 일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없는 공동체가 좋은 사회이니까. 그런 지점에서 도호쿠 대지진이나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가 개인의 절박한 사랑으로 치환된 것은 아쉽지만. 그럼에도 타키를 찾아간 미츠하처럼, 좋아한다고 고백한 타키처럼 절박해져야겠구나 다짐할 수 있었으므로.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영화였다.


그러니까, 나도 매일 아침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 타자기를 두드리고, 기어코 완성해 내어서 당신에게 나의 촌스러움을 보여야겠다. 가능하면 절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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