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눈길> 리뷰
*브런치 패스 시사회에 다녀와 작성하였습니다.
올해 친할머니는 아흔이다. 나랑 육십갑자가 같다. 무진년생. 가끔 해가 바뀔 때면 엄마 아빠의 나이는 헷갈렸어도 할머니의 나이는 한 번도 헷갈리지 않았다. 내 나이 더하기 60이니까.
여덟 살 땐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서류를 처리하는 부모님 곁에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나이를 처음 알게 되었다. 28년생인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아홉 살이나 어렸다. 그때까진 다 내 눈엔 다 할머니 할아버지였는데, 종이에 적힌 나이를 보니 할머니가 너무 어렸다. “할머니 왜 이렇게 할아버지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라고 물었을 때, 할머니는 “그때는 빨리 시집가지 않으면 일본에 다 잡혀갔다구.” 대답해주었다. 할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을 왔다고 했다.
유난히 할머니와 내가 육십갑자가 같은 게 마음이 쓰였다. 같은 무진년생인데. 순환의 한 주기일 뿐인데.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열여섯에 결혼이라니. 어린 마음에 혼란스러웠다.
영화 <눈길>은 2015년의 종분과 1944년 소녀였던 종분의 이야기로 교차 편집되어 진행된다. 그리고 나는 첫 과거 회상 장면에서 1944년이라는 자막을 보자마자 움찔했다. 1944년이면 우리 할머니가 열여섯이 되어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했다던 그 해였다.
강경에서 자란 두 소녀, 종분과 영애는 결국 목화솜 이불의 따뜻함 속에서 쫓겨나 시린 눈길 위의 차가움 속으로 내던져진다. 만주의 위안소로 짐승같이 끌려간다. 살벌하게 얼어버린 현실을 먼저 인식하는 것은 영애다. 제국주의 폭력 앞에서는, 계층 차이도 무력했다. 부잣집에서 신여성 교육을 받고 자란 영애도 결국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이 알려지면서 종분이와 같은 처지가 된다. 자신의 집에서 천을 받아다 풀을 먹여오는 가난한 집 큰딸인 종분이와. 학교라고는 아침밥을 굶고 간 남동생에게 감자를 전달하러 가본 적 밖에 없는 그 종분이와 같은 칸에 갇혀 끌려간다. 식민지에서 조선인/여자라는 마이너리티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논할 권리조차 없다. 선생님을 꿈꾸던 영애의 삶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영애는 이 낙차를 이겨내지 못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꽁꽁 얼어버린 얼음물 속에서 영애를 다시 건져내는 사람은 종분이다. 종분은 위안소 생활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일본군이 다녀간 후 종분이가 위안소의 마룻바닥을 닦아내는 장면은 지옥 속에서도 버텨나가고 있는 종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살아남아 영애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일단 이 곳에서 ‘생활’ 해야 하는 것이다. 먹고 자고, 포주가 먹으라는 약을 먹고, 일본 성매매 여성들의 빨래를 해주고 푼돈을 모으고. 종분에겐 그곳이 삶의 마지막 장소가 아니다.
‘살아남음’의 어떤 의미부여도 하지 못하는 영애에게 종분이 내민 것은 한글로 출판된 월간잡지 <소공녀>였다. 저고리 앞섶에 고이 숨겨두었던 책을 꺼내 영애에게 글 읽기를 가르쳐달라 부탁하는 종분은 영애에게 우리 아직 ‘인간’ 임을, 욕정의 쓰레받기가 아니라, 읽고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 임을 일깨워준다.
영애는 이제 차디찬 눈길을 걸으면서 목화솜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지금 여기는 고향집 아랫목의 목화솜 이불 따위 없으나, 시린 눈과 창살 밖 뭉게구름을 보며 ‘하얀’ 목화솜을 그리워한다.
건넌방의 여자애가 입으로 씹어 잘게 부서 준 화과자를 받아먹는 영애. 글을 배우며 더듬더듬 소공녀를 읽어나가는 종분. 파편도 없이 부서지고 흩어져버린 삶, 송두리째 짓밟혀 뭉개진 현실을 수용하고 또 하루를 살아나가는 영애와 종분. 어린 두 소녀가 보여주는 생의 의지는 숭고하고 경건했다.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목욕을 많이 했었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가 나를 키워주셨으니까. 욕조 안에 물을 받아 내 몸을 씻겨주면서 할머니는 말했었다. “난 다시 태어나면 우리 손녀딸처럼 태어나고 싶네.” 난 뭐 다시 태어나기까지 하는데 이렇게 소박한 바람을 말하나. 엄청난 부잣집 딸 정도는 돼야 되는 거 아닐까 쫑알거렸다. 철부지 손녀딸의 막말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얼마나 좋으냐.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있고, 집에 오면 엄마 아빠도 있고”
영애와 종분, 그리고 내 할머니의 삶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피해여성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처한 땅 위에서 또다시 씨를 뿌리고 일궈온, 그 위에 결국 꽃을 피운 그녀들의 삶 그 자체다.
'그땐 다 그랬다.' '사는 게 그렇다.'라는 말로는 누구의 삶도 이야기될 수 없다. 그때 다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기를 채웠다. 동시에 누군가는 짓밟히고 망가졌다. 사는 게 그렇지 않을 수 있었다. 누가 대체 왜 그랬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녀들이 가까스로 견디며 놓쳤던 사소한 일상을 선명하게 그려보아야 한다. 그 연결선 위에서 각자 자신의 삶의 의미를 곱씹어보았으면 한다. 영애와 종분이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살고자 했던 하루하루를. 나의 할머니가 포기해야 했던 다른 삶의 모습을. 오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의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