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꽤 맘에 들어.
대본을 습작하다보니 많이 변한다.
어딜가나 누구든지 말한다. 주인공은 매력적이어야 한다.
작가지망생들은 정말 글자 그대로 만번은 듣는 말이다.
왜 만번이나 반복해서 듣냐면, 이게 말이 쉽지, 이렇게 캐릭터를 만드는 일은 정말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간 잔망스러운 게 아니란 말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잘 안써진다. 어떤 장르를 쓰든 (멜로든, 스릴러든) 주인공은 공감가는 인물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어야 하고, 응원할 수 있어야 하니까. -짠해보이면 정말100% 성공이다- 얼굴이든, 성격이든, 재력이든, 능력이든 뭔가 아찔할 만큼 좋은 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매일 꿈꾼다. 대본 완성보다 캐스팅이 먼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얘는 왜 이렇게 매력이 없어요?”
“얼굴이 매력인데요?”
“아-” (세차게 끄덕끄덕)
얼굴이 매력이라는 작가의 대답에 바로 수긍가는 비주얼의 배우라면, 글로써 매력을 굳이 어필하지 않아도 될텐데. 안타깝게도 캐스팅보다 대본이 먼저 완성되어야 한다. 이야기 안에서 매력이 없으면 잘생긴 배우들이 연기해주지 않아. (난 매일 슬픈 꿈을 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은 어떤 매력을 가졌었지. 어떤 매력을 가진 사람한테 호감을 느꼈었지. 사람들은 어떤 지점을 ‘매력’이라 느끼고 마음을 열지. 혹은 사람의 어떤 못난 지점을 보고 ‘공감’을 느끼지.
결국 매일 좌절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인간은 사람의 좋은 점보다 안좋은점을 누구보다 빨리, 많이, 왕성하게 보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블블은 누굴 좋아해?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있어?
대학교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이런 농담을 하곤 했었다. (내가 지들 좋아하는거 뻔히 알면서 왜 그렇게 말해. 이 못된 것들아) 모여서 수다라도 떠는 날마다, 누구 이야기 나오면 “걔는 그래서 싫어” 누구 이야기 나오면 “걔도 별로야” 무한반복하던 인간인지라. 친구들은 항상 빵터지면서 “맞아. 넌 이 세상에 좋아하는 사람 없지.” 했었다. (너네라고 멍청이들아)
천성이 못돼 쳐먹어서일 수도 있고, 나중에 실망하기 싫어서일 수도 있고. 미리 안 좋은 점, 싫은 점을 쭉 뽑아내어 리스트화하면 나중에 실망할 일이 적어진다. 굳이 친해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어서 내 에너지를 아낄 수도 있고. 그런 편안함 때문에 나는 사람을 보면 좋은점보다 안좋은점을 먼저 보는 인간으로 자라왔다.
PD준비를 할 때에는 이런 지점이 더 강화되었었다. 항상 시청률이 나오지 않은 프로그램의 개선안을 생각해야만 했고, 어떤 지점이 잘못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시청률을 뽑을 수 있을지.
왜 저기서 저렇게 연출했지? 배우는 저 사람밖에 쓸 사람이 없었나? 아니 저기서 저렇게 이야기가 굴러가면 어떡해? 내내 이런 질문만 던졌던 것 같다. 작품의 못난 점만 계속 찾아내고 있었다.
20대의 나는 ‘나 외의 것들’과 관계맺는 법이 늘상 그랬다. 내내 사람의 안좋은점을 먼저보고, 계산하고 경계를 친 다음에 나와 잘 맞는 사람들만 만나왔던 것이다. 거기에 PD준비를 하면서 본의 아니게 이런 지점이 강화되었던 듯 하다. (전부 나처럼 PD준비를 하는건 아닐테니 성급한 일반화는 저에게만 적용해주세요-) 이게 뭐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기 자신과 잘 맞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미리 잘 간추려 만나 시간을 쓰는 일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쓸데없는 데 뭐하러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내가 대본을 쓰고 있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나는, 내가 만들어낸 인물에게 그 인물이 아무리 못난 놈이라도 매력 하나쯤은 심어줘야하는데, 그래야 이 이야기에 사람들을 빠져들게 할 수 있는데, 그런 관찰을 너무 오랫동안 안해왔던 것이다. 귀찮고 피곤하니까.
내가 왜 매일 좌절했냐면, 별로 생각나는게 없어서. 누가 매력적이었지?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사실 몇 개 없다. 자꾸 못나고 매력없는 인물들만 만들어진다.
매력적인 주인공을 만들려면 좋은 점, 왜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알아내는 관찰이 필요했다. 인간의 좋은 점을 먼저 찾아 뒤지기 시작해야만 했다. 이게 나에겐 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무 생소한 과정이다. 인류애 사라지고 환멸나는 순간이야 많지만, 어떤 한 사람의 좋은 점을 찾는 일은 가뭄에 콩나듯 일어났다. 굳이 애써 가문 밭에 나가 콩의 싹이 날까말까 관찰하는 공을 들이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타인의 매력에 무심했는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드라마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쉽고 편하게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리하는 동안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은 어떻게든 인물에게 매력을 붙여주려고-세상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도 줘보고, 비료도 줘가면서, 그래도 싹이 날거야. 계속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들어왔구나.
편하진 않아도 나는 그 길이 훨씬 멋있고 아름다워보였다. 그 길을 가고 싶어졌다.
요즘 습작하고 있는 나는 어떻게든 사람들의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드라마를 보아도, 좋은 점을 찾는다. 대안도 없는 주제에 함부로 폄하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그렇게 재미없었던 드라마들도 볼 구석이 생긴다. 아무리 이해가 안가는 글이라도, 왜 그렇게 썼을까 궁금해진다. 연출을 왜 저렇게 했지 아쉽기는 해도, 왜 저렇게밖에 못했나라는 식으로 접근하진 않게 된다. 그랬구나. 너도 주어진 상황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구나. 기획안을 쓸 때에는 그렇게 실눈을 뜨고 요리조리 안좋은점만 찾아내곤 했는데. 나도 놀랍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끈질기게 쳐다보면 보인다. 숨겨져있던 매력이 보인다. 이상도 하다. (물론 끝끝내 안보이는 사람도 상황도 있지만-이것도 그 나름대로 훌륭한 소재가 된다)
‘아름답다’는 말은 누군가의 첫인상이 아니라, 오랜 관찰의 결과값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사람이 변한다.
사람이 변해서 내가 쓰는 이야기가 변하는 것인지, 선후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확실히 변해가고 있고, 이런 내가 맘에 든다. 조금 더 오래 기억하고 바라볼게. 네가 반짝일 수 있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