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했어!

인생은 수미상관이 아니니까.

by 블블

[선생님 수미상관이 뭐에요?]


엊그제 과외학생에게 문자가 왔다. 평소의 나같으면 분명 화부터 났을텐데 왜인지 그 날 그 문자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가 측은했다. 일주일 연기된 수능에 예정에 없던 일주일치 공부를 더 하고 있을 아이. 1년 반 정도 과외수업을 진행할 동안 먼저 내게 질문했던 적이 거의 없는 아이였는데. 수능 이틀 전에는 질문을 먼저, 더군다나 문자로.


수미상관을 작년부터 몇 번을 가르쳤는지, 그때마다 얼마나 성심성의껏 반복해서 설명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모의고사 선지에 '수미상관'이 나올 때마다 세상 처음 보는 단어라는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보며 얼마나 답답했는지는, 이제와서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수능은 내일 모레였으니까.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었다. 미력하게나마 문자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설명일테니.


1연과 마지막연 사이의 연관성이 있어야한다. 1연의 시행이 그대로 마지막연에 반복될 수도 있고, 1연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올수도 있다. 누가보든 이 두 연 사이의 형식적 연관이 느껴져야 한다는 둥. 나도 잘 모르는 수미상관의 뜻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적었다. 조금 더 시 자료들을 분석해주었어야 했나. 벌금이라도 받아가면서 외우게 했어야 했나. 별별 생각이 들면서 나까지 초조해졌다.


띡띡띡띡 문자를 줄줄이 쳐놓고보니, 폰 액정으로 알아보기 어렵겠다 싶었다. 가능한 한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단어 사이사이 커서를 옮겨가며 줄바꿈 버튼을 누르던 찰나, 왜인지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지금 와서 '수미상관'이 뭔지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할까. 그 단어를 안다고 이 아이의 등급이 바뀔까. 올해 수능에 수미상관이 출제될까. 앞으로 이 아이 인생에 수미상관이란 단어가 등장할 일이 있기는 있을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수미상관 외울 시간에 연계작품 줄거리는 다 읽었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더 궁금하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렴.


결국 문자의 마지막은 힘없는 글귀였다. '언제든지 물어보렴' 다음에 어떤 말을 쳐야할지 아무래도 감이 오지 않았다. 좋은 결과가 나올거란 말은 거짓같았고, 부담갖지 말고 평소 하던대로 보라는 말도 아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닐 것 같았다.



눈가리고 아웅.


과외를 하다보면 부모와 학생, 과외선생인 내가 서로 모두 눈가리고 아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 아이의 학습능력이나 꿈을 외면한 채, 부모와 과외강사가 짝짜꿍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사실은 안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그저 돈만 벌면 되는 것일까.


수능 등급을 극적으로 끌어올려줄 수는 없어도, 적어도 아이가 글 읽는 재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길 바라며 아이들을 가르친다. 문득 인생에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이 외로울 때 손에 책을 잡게 되기를. 역을 오가다 잠시 들른 서점에서 눈에 들어온 시집을 뒤적거려볼 수 있는 아이가 되기를. 타인의 글이 곧 내 이야기가 되는 이 신비로운 세계를 향한 문을 걸어 잠그지는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과외를 해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타협했다.


지문을 읽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 일이라고. 그 때 적어도 상대방이 하는 말을 투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문단구성의 흐름, 작가가 내고자 했던 목소리의 결 정도는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눈꼽만큼이라도 내가 가르친 시간이 아이의 훗날에 도움이 되기를. 더 많은 세상의 이야기들로 삶이 풍요로워지기를. 그 과정에 일조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적어도 그런 눈가리고 아웅이라면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한들, 결국 줄세우기를 위한 시험장에 아이들을 보내야할 때는 속절없이 허무해지고 만다. 시를 가르치다 울음이 터져버린 아이를 달래본적도, 고전소설을 가르치며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아이를 만난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 물을 것이다. 그래서 그 둘은 어느 대학을 갔느냐고. '웃으면서 동창회 가자' '거울 볼 시간에 책 봐' 같은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을 책상 여기저기 붙여놓은 열아홉의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싸늘해진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네 인생의 행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아이들을 달래보지만, 정말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적어도 나는 그 시험에서 따낸 간판때문에 지금 글을 쓰며 과외를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면 우주의 먼지가 되는 기분이다. 나 역시 이 아이들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혼자 내린 타협 안에서 정신승리를 이뤄낸 것뿐.


그러니까. 결국 나는 미안할 뿐이다. 몇 년 빨리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러쿵 저러쿵 어떤 삶이 행복한지 조금 더 아는 척 하는 일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면서 나 자신과 아이들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결국 기존의 체계를 공고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 때보다 더 나아진걸까 의문을 지울 수 없는 상황에.


적어도 그 미안함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기억할 것이다. 네가 너무나 하기 싫어했던 글 읽기를 위해 책상 앞에서 아웅다웅 하던 시간들을 기억할테니.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를 읽다 울음이 터져버렸던 그 날도, <이생규장전>을 읽으며 이생의 찌질함에 대해 갑론을박하던 네 모습도 나는 알고 있으니까. 대학간판이나 수능점수따위가 아니라 오늘 세상을 바라보고 이야기한 너의 시선 그대로 이미 근사하다고. 그럼에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통과의례를 위해 오늘까지 참아온 네가 정말로 대견하다고.


인생은 수미상관이 아니니까. 얼마든지 네가 자유롭게 써내려갈 수 있으니까. 이제 마침내 주어진 그 자유를 만끽하길 바란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점수가 네 인생의 행복과 연관이 없다는 내 말이 '진짜'라는 걸 스스로 깨우치고 성장하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어서 어서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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