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약은 쓰지

아는데 왜 낯설지

by 블블

일주일 꼬박 감기에 걸려 고생 중이다. 코가 단단히 막히고 편도는 붓기 직전이다. 어릴 때부터 편도가 심하게 크니 호흡이 곤란할 수 있다며 수술을 여러 번 권유받았다. 멀쩡한데 뭔 수술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엄마 덕분에 목에 칼을 대진 않았지만. 어쨌든 편도가 잘 붓는 편인데, 나는 그 고통을 정말 너무나 싫어한다. 편도가 붓는 일만은 피해야 했다. 부랴부랴 동네병원을 세번째로 찾았을 때, 약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아 얼른 낫지 않는다는 의사선생님의 한소리를 들어야 했다. 약국에서 약을 타서 돌아오며 이번에 받은 이틀치 약은 꼬박 꼬박 챙겨먹기로 다짐했다.


오랜만에 읽고 싶은 책을 사러 광화문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서는, 분주하게 씻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잊지 않고 주섬주섬 옷 주머니에 점심 저녁 약을 챙겼다. 뿌듯했다. 아 오늘은 안까먹고 약을 챙겼구나. 책을 사들고 카페에 들어오니 마음이 따뜻해지기까지 했다. 유행하는 오렌지 티 라떼를 주문한 뒤, 따뜻한 물도 한 잔 부탁했다. 바쁜 파트너가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담아 줬다. 나는 찬물을 섞지 않는 파트너의 행동을 다 보고도 2층 자리에 돌아와 아무 생각없이 약봉투를 뜯어 입에 약을 털어넣었다.


앗 뜨거. 혀끝에 물이 닿자마자 뜨거움에 켁켁거렸다. 팔팔 끓는 물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물이 식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뜨거운 물로는 약을 삼킬 수 없어. 삼키지 못한 약들이 입안에서 떠다녔다. 알약의 쓴맛이 고대로 나에게 전해졌다. 덩어리진 약이 풀어지면 이런 맛이 나는구나. 그 맛이 얼마나 고약스러웠던지 인상은 찌푸려지고 눈물이 다 나왔다. 맛없어. 으엑. 고작 약을 녹여먹는 일로 눈물이 날 수 있다니. 나이 서른에 참 통렬하고 멍청한 깨달음이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뱉을 수도 없고, 2층에서 다시 1층으로 뛰어내려가 찬물 부어주세요 말할 수도 없고. 그저 가능한 입 안에 침을 많이 만들어 삼켜보려고 애쓰는 수 밖에. 속상하다. 보통 이런 멍청한 짓은 중학교 때 끝내지 않나. 얼마나 더 바보스러운 경험들이 필요한 걸까.


챙겨먹지 않던 약을 챙겨먹으려고 해서일까. 멍청하게 뜨거운 물이 금방 식을거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물 먼저 마셔보지도 않고 약봉지부터 뜯어서였을까. 애초에 내 편도는 왜 큰 것일까. 입에 약을 물고 있는 동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얼른 삼키고 싶다. 제발 넘어가줘. 눈을 가늘게 뜨고 겨우 타자기를 두드리며 버텼다.


알약덩어리들이 목구멍을 넘어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녹아버린 가루의 기운이 입안에서 가시질 않았다. 티 라떼를 아무리 벌컥벌컥 마셔도 쓴맛과 섞인 맛이 났다.


알약처럼 잘 코팅된 쓴맛들이 있지 않을까. 내 감정에도. 꿀떡 삼켜버려서 몰랐던, 물과 어물쩍 같이 마셔버려서 잘 알지 못하던 맛들이, 감정들이 있지 않을까. 조금 참으면 될 것 같아서 굳이 어떤 액션을 취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코팅이 벗겨져버린 쓴 맛의 알약을 입에 머금고 앉아있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일들이. 지나가고 난 후에도 한참 여운을 남기는 일들이.


사실은 그런 바보짓을 하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게 되는 진짜 맛 같은거.


해열제와 버무려먹던 가루약을 졸업한 이후에는 약의 진짜 맛을 모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나이들어가는 일과 미묘하게 닮아있어서 영 느낌이 오묘했다. 어느 날부터 매일매일 꿀떡 삼켜버리고 살피지 못했던 내 마음에는 어떤 '진짜 맛'이 숨어있을까. 매울까. 쓸까. 아니면 달까. 매번 섬세하게 살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느끼고 싶지 않은 맛에는 알약처럼 코팅을 하는 일도 나쁘지 않다. 그저 습관처럼 무뎌진 것이, 내가 무뎌졌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쓴맛을 잊어왔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소화제의 대명사. 훼스탈의 단 맛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기회가 오면 한번 오래 물고 있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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